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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인사 Dec 30. 2022

담론

신영복 교수님의 책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강의'를 읽고 나니,

자연스럽게 '담론'에 손이 갔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철학이 집대성되었다고 평가받는, '담론'의 교훈적인 이야기들을 적어봅니다.


[담론 _ 신영복 지음 _ 돌베개 출판사]


1) 권력의 자리

 자리와 관련해서 특히 주의해야 하는 것은 권력의 자리에 앉아서 그 자리의 권능을 자기 개인의 능력으로 착각하는 경우입니다. 그것을 구분해야 합니다. 알튀세르(Louis Althusser)의 비유가 신랄합니다. "히말라야 높은 설산에 사는 토끼가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가?" 동상(凍傷)이 아니었습니다. "평지에 사는 코끼리보다 자기가 크다고 착각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부려서 하는 일이 자기의 능력이라고 착각하면 안 됩니다. 사람과 자리를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2) 맹자의 여민락

제 선상도 맹자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나는 사냥터가 40리밖에 안 되고, 문왕은 70리나 되었는데, 문왕은 인자한 임금이라 하고, 왜 나는 나쁜 임금이라고 합니까?" 맹자의 대답입니다. "문왕은 사냥터를 개방하고 당신은 개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즐거움이란 독락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 맹자의 여민락입니다.


3) 곡돌사신

 묵자가 초나라의 송나라 침공을 저지하고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마침 송나라를 지나가고 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습니다. 묵자가 여각에서 비를 피하려 했지만 여각 문지기가 들여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쟁으로 공을 세운 사람은 세상이 알아주지만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은 알아주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집에 불이 나기 전에 굴뚝을 수리하고 아궁이를 고친 사람의 공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불 난 뒤에 수염을 그슬려 가며 옷섶을 태우면서 뛰어다닌 사람의 공로는 널리 인정한다는 것이지요. 곡돌사신(曲突徙薪)이라는 성어가 그것입니다. 굴뚝을 돌려놓고 장작을 옮겨 놓는다는 뜻입니다. 불이 나지 않도록 예비하고 불이 옮겨 붙지 않도록 미리 단속하는 사람은 몰라보는 세태를 그렇게 지적하기도 합니다.


4) 목수의 집 그리는 순서

 왕년 목수 시절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집을 그렸습니다. 땅바닥에 나무 꼬챙이로 아무렇게나 그린 집 그림을 보고 놀랐습니다. 집 그리는 순서 때문이었습니다. 주출돌부터 그렸습니다. 노인 목수 문도득은 주춧돌부터 시작해서 지붕을 맨 나중에 그렸습니다. 엄청난 충격이었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집 그리는 순서와 집 짓는 순서가 같구나. 그런데 책을 통해서 생각을 키워 온 나는 지붕부터 그리고 있구나.'


5) 눈썰매 이야기

 닛타 지로의 '알래스카 이야기'에서 읽은 눈썰매 이야기입니다. 알래스카에서는 눈썰매를 끄는 여러 마리의 개 중에서 가장 병약한 개의 줄을 짧게 맨다고 합니다. 개들이 빨리 달리게 할 때에는 짧게 매여 있는 개를 채찍으로 때립니다. 그 병약한 개의 비명이 다른 개들을 더욱 빨리 달리게 합니다. 그 병약한 개가 죽고 나면 나머지 개 중에서 가장 병약한 개가 그 자리에 묶입니다. 혹시라도 자기가 썰매를 끄는 위치에 있다면 엄벌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엄벌을 주장하는 사람은 썰매를 끄는 사람이 아니라 썰매를 모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엄벌이란 병약한 개를 채찍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충분히 연구되어 있습니다. 엄벌과 공포는 사회를 경직시킵니다. 반대로 참여와 소통은 많은 사람들의 잠재력을 고양하고 사회 역량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와 소통 구조는 자칫 썰매 위의 자리가 침범될 수 있다는 불안 때문에, 그리고 사회란 원래 썰매의 위아래가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약한 개를 채찍으로 때려 왔습니다. 법과 정의 그리고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습니다. 그것이 바로 강자의 위선입니다.


6) 함께 맞는 비

 '함께 맞는 비'는 내가 붓글시로 자주 쓰는 작품입니다. 이 글의 핵심은 작은 글씨로 쓴 부서에 있습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오늘 마침 비도 오고 있습니다. "돕는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것이 이 글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7) 싸가지 없는 사람 

 어느 감방이든 감방마다 '싸가지 없는 사람'이 반드시 한 명씩 있습니다. 싸가지 없는 사람이란 무례하고, 경우도 없고, 하는 짓이나 하는 말 어느 것 하나 밉지 않은 구석이 없는 사람을 일컫습니다. 사회라면 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징역살이는 다른 곳으로 피할 수도 없습니다. 괴롭기 짝이 없습니다. 성질 급한 사람이 주먹다짐으로 혼찌검을 내기도 합니다. 그래도 소용없습니다. 어쨌든 교도소에는 어느 감방이든 그런 사람이 꼭 한 명씩 있습니다. 우리는 그 친구의 출소 날짜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저 자식 만기가 언제지? 얼마 남았지?' 드디어 그 친구가 출소하고 나면 참으로 행복한 밤을 맞이합니다. 앓던 이 빠진 듯 시원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행복한 날도 며칠뿐, 어느새 그런 사람이 또 생겨납니다. 다시 우리는 그 친구의 만기 날짜를 손꼽아 기다립니다. 나가면 또 생기고, 나가면 또 생기고... 여러 사람을 보내고 난 다음에 비로소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처한 힘든 상황이 그런 표적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당사자인 그에게 그만한 결함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우리가 처한 혹독한 상황이 그런 공공의 적을 필요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여러 사람을 보내고 나서 뒤늦게 깨달았던 것입니다.


8) 콜럼버스와 계란

 여러분도 잘 아는 계란 이야기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계란을 책상 위에 세우지 못하는데 콜럼버스만이 계란을 세웠습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단지 발상의 전환에 관한 일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계란의 모양은 어미 닭이 체온을 골고루 줄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입니다. 모든 알이 그렇습니다. 어미 품을 빠져나가 굴러가더라도 다시 돌아오게끔 만들어진 타원형의 구적입니다. 바로 생명의 모양입니다. 이것을 깨뜨려 세운다는 것은 발상의 전환이기에 앞서 생명에 대한 잔혹한 폭력입니다. 잔혹한 폭력을 발상의 전환이라고 예찬하는 우리의 무심함은 무심함이 아니라 비정함에 다름 아닙니다.


9) 우울증

 모든 질병 중에서 가장 결정적인 질병이 소위 '우울증'입니다. 후기 근대사회의 질병입니다.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일반적인 질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전까지의 질병은 인체의 외부에서 침투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울증'은 내부에서 발생하는 질병입니다. 자본축적 환경이 치열해지면서 그 시스템 속에 소속해 있는 모든 주체들은 이제 '성과 주체'로 전락합니다. 더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질주합니다. 그림자를 추월해야 하는 가망 없는 질주입니다. 성과 주체의 경우 노동을 강요하거나 착취하는 외적 지배 기구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복종적 주체와는 구별됩니다. 외적 지배 기구가 없다는 사실이 언뜻 자유롭긴 하지만 더욱더 부자유한 상태로 전락합니다. 이른바 자기 착취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10) 핀란드의 반부패 지수가 1위인 이유

 부패 문제는 흔히 윤리적 문제로 인식됩니다. 그러나 부패의 근본 원인은 경쟁입니다. 사활이 걸린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정직한 방법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부정을 감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근과 채찍 사이에서 벌이는 사활적 질주에서 못할 짓이 없습니다. 부패는 치열한 자본축적 과정의 필연적 사회현상입니다. 그것을 윤리 문제로 분리하여 거론하는 것 자체가 축적 구조의 모순을 은폐하는 논리입니다. 핀란드는 국제투명성기구가 선정한 반부패 지수 연속 1위 국가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핀란드 교육'입니다. 핀란드 교육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모든 학생들의 성적은 세 가지로 평가됩니다. '잘했어요', '아주 잘했어요', '아주아주 잘했어요' 이 세 가지밖에 없습니다. 교육이란 사회가 책임져야 할 공공재입니다. 교육비도 개인이 부담하고 교육의 성과도 개인이 사유화하는 신자유주의 교육 환경과는 판이합니다. 경쟁은 옆 사람과의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나 자신'과의 경쟁입니다. 이러한 교육 환경과 사회 환경이 반부패 지수 1위 국가로 만듭니다.


[책장을 덮으며]

 현대사회는 무한 성장을 요구합니다. 끊임없는 경쟁에서 오로지 살아남을 것만을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 간의 정과 배려보다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만이 우선시되고 있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은 이와 같은 경쟁사회에 사람으로서의 기본적인 마음을 되돌아보게 해주고 있습니다. 특히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70%의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다', '사람과 자리를 혼동해서는 안된다'와 같이 사람의 근본 자질에 대한 잔잔한 가르침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담론'을 통해서 가장 크게 와닿은 2가지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겸손과 공감'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어떤 상대라도 존중할 수 있는 자세가 겸손을 가져옵니다. 공감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닌, 상대방이 처한 현실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해하면 설명하려 하지만, 함께하면 느낄 수 있습니다.

 신영복 교수님의 '담론'을 통해 보다 성숙한 사고를 할 수 있는 교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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