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이 창의성을 낳습니다.
요즘 최재천 교수님의 책을 읽고 있습니다.
‘최재천의 공부’를 먼저 읽었고,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를 읽었습니다.
공부와 생명의 소중함을 넘어, ’ 다양성‘에 대해 알게 해 준 ’다르면 다를수록‘의 교훈적인 이야기들을 적어 봅니다.
어느덧 이 땅에서 연례행사처럼 벌어지는 조류독감은 우리가 기르는 닭의 유전자 다양성이 고갈돼 벌어지는 생태 재앙이다. 비록 당장은 한두 마리의 닭이 비실거리지만 자칫하면 유전자 다양성을 상실해 거의 ‘복제 닭’ 수준인 수천 마리가 순식간에 감염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몽땅 끌어다 묻는 것이다. 우리 정부는 자꾸 철새들에게 손가락질하지만 정작 그들은 조류 독감 바이러스가 돌아도 몰살하지 않는다. 유전적으로 서로 다르기 때문에 유행하는 바이러스에 운 나쁘게 취약한 몇 마리만 죽을 뿐이다. 자연은 순수를 혐오하고 다름을 추구한다.
예전에는 여러 다양한 식물들이 한데 어울려 자라던 곳을 우리가 깨끗이 밀어내고 딱 한 종류의 식물만 심는다. 마침 우리가 심어 놓은 그 작물을 특별히 좋아하는 해충에게는 더할 수 없이 신나는 일이다. 자연생태계에서는 자기가 좋아하는 식물을 다 먹어 치우고 나면 갈등의 순간이 찾아온다. 자연에는 똑같은 식물이 바로 곁에서 자랄 확률이 적기 때문에 같은 식물을 먹겠다고 고집할 것인가 아니면 썩 좋아하지는 않지만 바로 곁에 있는 식물을 먹을 것인가 결정해야 한다. 기어코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식물을 계속 갉아먹으려면 그 식물을 찾아 길을 떠나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리 대단한 거리가 아니더라도 작은 애벌레에게는 엄청난 여정일 수 있다. 그러는 동안 식물을 생육할 시간을 번다. 농사는 곤충들에게 그런 시간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다름이 공존을 허용한다.
벚나무는 참 재미있는 나무다. 지금은 벌들이 잉잉거리며 꽃들을 찾지만 이제 곧 꽃이 지고 나면 벚나무는 개미들 차지가 된다. 벚꽃은 여느 꽃들과 마찬가지로 꽃 속 깊숙이 꿀샘이 있어 그곳을 찾는 벌들에게 단물을 제공하는 대신 꽃가루를 운반하게 한다. 그런데 벚나무는 꽃 속 외에도 꽃 밖에 꿀샘들을 갖고 있다. 이파리 밑동마다 한 쌍의 꿀단지들이 달려 있다. 이른바 꽃밖꿀샘이라 부르는 그곳에는 개미들을 위하여 벚나무가 특별히 단물을 담아 둔다.
꽃밖꿀샘을 갖고 있는 식물은 벚나무만이 아니다. 우리나라에도 적지 않은 수의 식물들이 꽃밖꿀샘을 마련하여 개미들을 유혹하고 있지만, 열대로 갈수록 훨씬 더 많은 식물들이 꽃 밖에도 다양한 모습의 꿀샘들을 지니고 있다. 식물의 종류를 막론하고 꽃밖꿀샘은 모두 오로지 개미를 위해 마련한 기관이다. 개미가 집에 간 틈을 타 다른 곤충들이 가끔 들르기는 하지만 개미가 주된 고객이다. 당분을 얻는 대신 개미는 식물을 초식곤충들로부터 보호한다. 식물과 개미가 오랜 진화의 역사 동안 상생의 지혜를 함께 터득한 결과이다.
생물과 생물 간의 관계는 서로가 얻는 손익에 따라 크게 네 가지로 나뉜다. 개미와 진딧물, 그리고 꽃과 벌 사이처럼 양측이 모두 이득을 얻는 관계를 공생이라 부른다. 공생을 좀 더 세분하면 한쪽을 이득을 보지만 다른 쪽에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 관계를 편리공생이라 하며, 양측이 공히 이득을 위하는 관계는 상리공생이라고 한다.
한쪽은 손해를 보는 대신 다른 쪽에는 이익이 되는 관계로는 포식과 기생이 있다. 남을 잡아먹고사는 동물이나 남에게 빌붙어 사는 생물들이 만드는 관계들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호랑이와 모기는 비슷한 존재들이다. 그리고 양측이 모두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관계는 말할 나위 없이 경쟁이다. 그런가 하면 나도 손해를 보지만 남의 손해가 내 것보다 크기만 할 때 성립하는 관계는 악의 spite에 의한 관계인데 이론적으로는 가능하지만 자연계에서는 마땅한 예를 찾기 어렵다.
생태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네 관계들 중 경쟁과 포식 그리고 기생이 가장 흔하며 ‘성공적인’ 관계들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지난 수십여 년간의 연구로 이들 관계에 못지않게 수많은 생물들이 공생의 지혜를 터득하여 성공을 거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악의에 의한 관계는 자연계의 그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했다. 인간 사회를 제외하고.
까치는 여간해서 지난해에 썼던 둥지를 또 쓰지 않는다. 아마도 같은 둥지를 계속해서 사용하면 그곳에 득시글거리는 기생충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에 진화한 적응이겠지만 그 큰 집을 해마다 새로 짓는 정성은 실로 놀랍다. 새 집을 지을 적당한 나뭇가지가 부족하면 헌 집에서 서까래나 기둥을 몇 개 뽑아 쓰기는 하지만 빈집은 대개 그대로 버려진다. 물론 그들에게 역사적 상징물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그러나 인간이 인간됨은 그런 ‘우스운’것에 연연해할 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침팬지의 도구 제작은 구석기시대를 넘지 못했다. 물론 전반적인 지능이 인간에 비할 바가 아니었겠지만 신체 구조적인 차이도 한몫을 했다. 침팬지의 손은 지문도 있고 손금도 있어 인간의 손과 많은 면에서 매우 흡사하지만 한 가지 결정적인 차이를 지닌다. 침팬지의 엄지는 인간의 엄지와 달라 나머지 네 손가락들과 마주 보지 않는다. 엄지손가락이 비틀어질 때 다른 손가락들과 마주 보게 된 사건은 인류 진화사에서 엄청난 혁명이었다.
엄지와 다른 손가락들의 맞붙임 구조는 인간으로 하여금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만들었고 정교한 도구를 제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이는 거의 의심의 여지없이 되먹임 과정을 통해 인간 두뇌의 진화에 기여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지는 흔히 ‘신의 축복’이라 불린다. 침팬지와 우리의 DNA는 불과 1퍼센트 남짓 다를 뿐이다. 하지만 그 1퍼센트의 차이 속에는 지금으로부터 약 600만 년 전 우리 인류의 조상과 침팬지의 조상이 각기 서로 다른 진화의 길로 들어서며 서로에게 흔들어 주던 두 손의 운명이 엇갈려 있다.
놈팡이 개미들은 사실 놀고먹는 것이 아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이른바 ‘대기조’ 대원들이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의 소방대원들과도 같다. 얼핏 빈둥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방대원들은 사실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화재에 대비하여 늘 긴장 상태로 대기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기껏해야 소방대원을 비롯한 몇몇 직업인들에게만 ‘빈둥거릴’ 자격을 부여하는데 비해 개미 사회는 그들이 가진 잠재 노동력의 무려 3분의 2를 위기관리에 투자하고 있다. 개미들이 1억 년 가까이 다듬어 온 생활의 지혜다. 결코 우습게 넘길 일이 아닐 듯싶다.
식물은 꽃가루받이를 해 줄 동물에 따라 맞춤 꽃을 준비한다. 일단 동물의 환심을 사고 난 다음에는 식물의 절묘한 줄다리기가 벌어진다. 우리 인간 사회의 연인들이 벌이는 사랑의 줄다리기 뺨친다. 화려한 색이나 거부하지 못할 냄새로 자신의 꽃가루를 옮겨 줄 동물을 끌어들인 식물이 한 번의 방문에 그 사랑의 전달자가 원하는 양의 꿀을 다 주어 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꿀벌을 예로 생각해 보자. 한 배 가득 꿀을 들이켠 벌은 곧바로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다음 꽃을 방문할 여력도 없고 까닭도 없다. 식물은 애써 그 동물을 유혹하여 선물 공세까지 펴며 저쪽 언덕에서 살포시 미소 짓는 같은 종의 다른 꽃을 찾아가 대신 잠자리를 가져 달라고 부탁했건만 배가 부를 대로 부른 벌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꽃들은 벌들에게 그저 감질날 정도로 적은 양의 꿀을 줄 뿐이다. 그래야 한술에 배부를 수 없다는 걸 아는 벌들이 이 꽃, 저 꽃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선물이란 원래 한꺼번에 다 안겨 주는 게 아니다.
스스로 세워 놓은 높은 생활 수준에 맞추려 밤낮없이 일해 땔감을 버는 동물이 인간이라면 없으면 없는 대로 조금 덜 먹고 덜 쓰는 동물이 바로 뱀이다. 그저 일주일에 한 번 또는 한 달에 한 번만 식사를 하면 그만이다. 객쩍게 돌아다닐 필요도 없다. 큰 뱀일수록 듬직한 먹이 한 마리를 삼키곤 길면 몇 주씩 지긋이 한자리에 머문다. 천민과 선비가 사는 법은 이처럼 다르다. 뱀은 느림과 절제의 미학을 일찍부터 깨달은 동물이다.
부의 고른 분배는 공산주의 체제에서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다. 어떤 체제든 완벽하게 평등한 분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사회를 구성하고 사는 동물들의 경우 적절한 분재가 이뤄지지 않으면 사회가 붕괴할 수밖에 없다는 이론이 나왔다. 이른바 ‘비대칭 이론(skew theory)’에 따르면 한 수컷이 모든 암컷들을 혼자 독차지해서는 사회가 유지될 수 없다. 후궁을 많이 거느리기로 유명한 북방코끼리바다표범 수컷들도 기껏해야 100여 마리의 암컷을 거느릴 뿐이다. 삼천 궁녀는 허상일 뿐이다. 붉은 큰 뿔사슴 총각들은 종종 떼를 지어 다른 수컷들의 영역으로 쳐들어가 폭동을 일으킨 후 암컷들을 훔치기도 한다.
비대칭 이론에 따르면 적절히 베풀어야 베풀 수 있는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가진 이들은 너무나 베푸는 일에 인색하다. 빌 게이츠(Bill Gates)를 비롯한 서양의 거부들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다. 그들이 천성적으로 남에게 베풀 줄 알아서가 아니라 베풀지 않으면 그들의 기반이 밑바닥부터 무너진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난 폭동 때 흑인들이 집중적으로 약탈한 민족도 바로 우리 한인들이었다. 움켜쥐기만 하다 보면 전부를 잃을 수 있다.
저자 최재천 교수님의 이야기가 귓가를 맴돕니다. ”다양성이 창의성을 낳습니다.“ 자연은 다양성을 추구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효율성을 위해 단일화를 추구합니다. 현대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은 겉으로는 창의성과 통섭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효율성을 극대화 한 단일화를 추구한 인간들의 위선에 따른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르면 다를수록, 그 다름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다름을 이해하는 환경에서 창의성이 피어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