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처럼 균형을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최재천 교수님의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를 읽었습니다.
‘ 최재천의 공부’,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다르면 다를수록‘에 이어,
자연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교훈에 대해 적어봅니다.
세상에는 농사를 지을 줄 아는 동물이 딱 셋이다. 개미, 흰개미 그리고 우리 인간. 도심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논밭이 보이니까 인간은 존재의 역사 내내 농사를 짓고 살았을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 줄 안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 인간이 농사를 지어온 기간은 그저 1만 년 남짓에 지나지 않는다. 현생 인류, 즉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지구에서 살아온 기간이 적어도 20만 년은 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1만 년이면 전체의 5%에 불과한 시간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존재의 역사 중 95% 이상은 주워 먹고 잡아먹는 수렵채집 생활을 했고, 최근 5% 동안 겨우 길러 먹으며 살았다. 객관적으로 볼 때 인간은 최근에 농경을 개발해 시도해보고 있는 신참 농군일 뿐이다.
이에 비하면 잎꾼개미의 농경 역사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이 기르는 버섯의 DNA를 추출해 염기(base)가 변하는 속도를 측정한 다음 역산해 보면 개미 농장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길러졌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DNA 검사 결과에 따르면 잎꾼개미는 장장 6,500만 년 동안이나 농사를 지어왔단다.
권위를 얻는 길에는 두 갈래가 있다. 스스로 드러내며 취하는 권위와 남들이 마음으로 떠받들어주는 권위는 질적으로 다르다. 지위가 높으면 권위는 자동으로 따라온다. 지위가 높다고 권위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은 본인이 열등의식의 소유자임을 드러내는 것이며 그렇게 얻은 권위는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상황이 바뀌면 새벽안개처럼 허무하게 사라진다. 가진 자와 높은 자는 무조건 미안해야 하고 더 허리를 굽혀야 한다.
리더가 말을 줄여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다. 윗사람이 입을 떼는 순간 아랫사람들은 영원히 입을 다문다. 그래서 나는 3년 동안 정말 어금니가 아플 정도로 참았다. 온 세상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해대는 바람에 한때 ‘국민 강사’라는 별명까지 얻었지만 직원들을 위해 강의를 해달라는 여러 차례 요청에도 절대로 응하지 않았다. 나중에 월례조회에서 그저 10~20분 뼈 있는 얘기를 조금씩 하기는 했지만 나는 정말 되도록 말을 줄이기로 굳게 결심하고 지키려 노력했다. 그러나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미지수다.
평생 교수로 살며 제자들에게 제일 자주 한 말이 뭘까 생각해 봤다. 아마 “쓰는 놈이 왕이다”일 것 같다. 나는 학생들에게 왜 논문을 써오지 않느냐고 직접 다그치지는 않지만 이 말로 은근히 압박한다. 학자는 결국 논문과 저서로 평가받는다. 아무리 능력이 넘치고 열심히 연구했어도 글로 써내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이 말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내 첫 논문이 나온 해가 1982년이니 지난 35년 동안 나는 이 말을 스스로 되뇌며 참으로 열심히 줄기차게 글을 쓴 것 같다. 국제학술지에 발표한 논문만 120편이 넘고 펴낸 책도 저서, 역서, 공저, 편저를 합해 거의 100권에 육박한다. 나는 결코 우리나라 과학자 중 최고가 아니다. 내가 다른 많은 과학자보다 널리 알려진 이유는 책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 이래 가장 대단한 물리학자로 사람들이 파인만(Richard Feynman)을 꼽고, 그 많은 생물학자 중에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를 기억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쓰는 놈이 단연 왕이다.
부분과 전체를 모두 챙긴다면서 절대로 저지르지 말아야 할 실수는 자기가 모든 일을 실제로 다하는 것이다. 과감하고 슬기롭게 일을 나눌 줄 알아야 한다. 직접 해야 할 일과 위임할 일을 현명하게 구분해야 한다. 위임(Delegation)의 묘를 살릴 줄 모르면 리더로서 몸과 마음 모두를 잃는다. 나는 대학 시절 과대표와 학도호국단 문예부장에 온갖 동아리 회장 자리까지 꿰찬 채 교실 안보다는 밖에서 훨씬 바쁘게 살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그 당시 위임이란 걸 할 줄 몰랐다. 거의 모든 일을 혼자 다 하느라 몸은 몸대로 지치고 마음은 마음대로 서운했다. 그러나 오랜 미국 생활에서 배운 값진 교훈 중 하나가 바로 위임의 지혜다. 생태원장이 되기 전에 조직의 리더로서 내가 갖추고 있던 유일한 덕목이 바로 위임이었다.
작은 것을 탐하다 큰 것을 잃는다는 의미의 사자성어 소탐대실을 나는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대탐소실을 실천하며 산다. 큰일을 하려면 작은 걸 수시로 포기해야 한다. 리더가 자꾸 작은 일에 간섭하고 사사건건 지적하기 시작하면 일단 일의 진전이 느려지고 서서히 아무도 책임을 지려 하지 않는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무엇보다 결정을 내려주는 것이다. 사람들의 유형을 흔히 돈키호테와 햄릿으로 나누는데, 이 구분을 그대로 리더의 분류에 적용하는 것은 위험하다. 나는 리더십에 관한 강의를 할 때 리더의 덕목을 다음 셋으로 규정한다. 우선 리더(leader)는 리더(reader)여야 한다.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일단 리더로서 자격이 없다. 리더는 조직의 그 누구보다 많이 알아야 한다. 쓸데없이 자질구레한 것들을 미주알고주알 다 꿰고 있을 필요까진 없을지 모르지만 사태의 전후좌우는 확실하게 파악해야 하고 이런저런 위기를 해결해 낸 선지자들에 대해 폭넓은 지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리더는 무엇보다 책을 가까이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고 리더는 생각하는 사람(thinker)이어야 한다. 생각을 깊이 할 줄 모르고 경거망동하는 사람이 조직의 리더가 되면 본인의 인생만 망치는 게 아니라 애꿎게 함께하는 많은 사람의 인생도 한꺼번에 수렁에 처넣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리더는 책도 많이 읽고 생각도 깊게 해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아줘야 한다. 리더는 길잡이(pathfinder)여야 한다.
석박사 과정 학생들을 호되게 야단치며 일하면 단기간에는 분명히 더 많은 연구 업적을 뽑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구실과 연구실 대표인 교수에게 좋은 일일 뿐 정작 학생의 발전에 좋은지는 명확하지 않다. 석사와 박사 학위는 사실 그 분야 최고 전문가가 되었다고 주는 게 아니다. 이제 혼자서도 연구를 수행할 능력을 갖춘 독립적인 연구자가 되었다며 일종의 연구 자격증을 주는 것이다. 학생들이 내 연구실을 떠난 후에도 훌륭한 연구자로 서러면 스스로 연구하고 그에 따라 자기 삶을 운영할 능력을 길러야 한다. 야단을 많이 맞는 학생은 야단을 맞지 않으려 노력할 뿐 근본적으로 더 훌륭한 학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장은 남이 키워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크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가장 무거운 생물집단이 누구일까? 그건 고래나 코끼리가 아니라 꽃을 피우는 식물, 즉 현화식물이다. 이 세상 모든 동물을 합쳐도 식물 전체의 무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지구는 누가 뭐래도 식물의 행성이다. 자연계에서 수적으로 가장 성공한 집단은 누구일까? 단연 곤충이다. 그렇다면 곤충과 식물은 과연 어떻게 이처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을까? 한 곳에 뿌리는 내리는 바람에 움직여 다닐 수 없는 식물은 꽃가루받이를 위해 애써 꿀까지 제공하며 ‘날아다니는 음경’을 고용하며 공생사업을 벌였다. 곤충과 식물은 결코 호시탐탐 서로 제거하려는 무차별적 경쟁을 벌이며 살아남은 게 아니다.
나는 10년 전 어느 일간지에 ‘정부의 경제 규제 불가사리만큼만’이라는 제목의 시론을 쓴 적이 있다. 미국 시애틀에 위치한 워싱턴대학교 생태학자 페인(Robert Paine)은 암석 해안의 물웅덩이에 서식하는 생물 군집을 대상으로 유명한 포식(predation) 실험을 실시했다. 물웅덩이 생물 군집의 최상위 포식자인 불가사리를 제거하면 평화로운 황경이 조성되리라는 기대를 안고 실험군 물웅덩이에서는 계속 불가사리를 제거했고 대조군 물웅덩이에서는 평상시대로 불가사리를 그대로 두었다.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두 군의 물웅덩이 내 생물다양성을 조사해 보니 뜻밖에도 불가사리가 따개비, 홍합, 달팽이 등을 잡아먹게 내버려 둔 물웅덩이에 다양한 생물이 살고 있었다. 최고 포식자인 불가사리가 사라진 물웅덩이에서는 경쟁력이 가장 강한 홍합이 거의 모든 고착 공간을 차지하는 바람에 해조류가 단 한 종만 겨우 살아남았다. 따라서 그 해조류를 먹고살던 다른 모든 초식동물도 사라졌다. 불가사리는 이 생태계에서 지나치게 독점력이 강한 종을 제거함으로써 그보다 경쟁력이 조금 부족한 다른 많은 생물이 틈새 공간을 활용하며 살 수 있게 해 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정부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불가사리만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산이 화성을 축조하려고 토목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문헌을 뒤져본 것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청나라에서 건축 관련 서적을 한두 권 구해서 읽어본 정도였을 것이다. 당시에는 그 정도만 해도 기본적으로 명석한 두뇌만 있으면 조선팔도 최고 토목공학자로서 당당히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이제 더는 우리 사회에 그들과 같은 학자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지난 두 세기 동안, 즉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우리 인류가 축적한 지식의 종류와 규모가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다. 이제 한 개인이 여러 학문 분야를 완벽하게 통달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한 분야를 좁고 깊게 파고들어 가기를 시도했다. 이것이 바로 전문화(specialization)이며 우리 대부분은 모두 나름대로 자기 분야 전문가들이다. 그런데 자칭 전문가들인 우리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진리를 향해 파고드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깊게 파고들면 들수록 점점 더 좁아지는 전문공간에서 몸을 제대로 움직이기조차 힘들어한다. 도대체 무슨 연유일까 고민하던 나는 2006년 연말 <동아일보>의 ‘내 마음속의 별’이라는 코너에서 가야금 명인 황병기 선생이 챌리스트 장한나에게 덕담으로 들려준 우리 옛말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우물을 깊이 파려면 넓게 파라.”
현대사회의 수많은 문제들의 시작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요? 이 책을 읽어보니, 인간의 교만함과 자만심이 문제의 시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연은 겸손합니다. 자연은 공생을 추구합니다. 자연은 서로 베푸며 살 줄 압니다.
하지만 인간은 그와 반대로 행동하여 문제를 야기합니다. 권위적으로 상대를 배척합니다. 함께 살아가기보다는 독점하려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자연처럼만 하면 좋겠습니다. 자연은 모두가 더불어 살 수 있는 균형을 갖추고 있습니다.
숲에서 경영을 가꾸자는 저자의 주장에 적극 동감하게 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