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
금요일 저녁.
모처럼 대학 동기들을 만나러 20여 년 전, 졸업한 대학교에 왔습니다.
오랜만에 와 본 대학교는 여전히 젊음의 기운이 가득했습니다.
사실 오늘 어떤 모임을 참석할지? 살짝 고민을 했습니다.
오늘은 총동문회도 있는 날이고, 동기들과의 연말 모임도 있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동기들과 함께 총동문회를 참석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총동문회 자리를 불편해하는 동기들도 많기에,
시간 가능한 동기들끼리만 모이기로 했습니다.
동기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사회 곳곳에서 자신만의 커리어를 쌓아가는 이야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도전을 하는 동기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습니다.
항상 회사에서 똑같은 사람들과 똑같은 이야기만 주고받다가,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기들을 보니 저의 관점도 넓게 확장할 수 있어서 더욱 좋았습니다.
그런데 약간 불편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총동문회를 마친 동문회 임원 선배들이 저희가 있는 음식점으로 온 것입니다.
"야! 왜 너희들끼리 따로 모였어? 오늘 총동문회 하는 거 몰랐어?"
라는 이야기를 하며, 선배들이 식당으로 들어왔습니다.
뒷 테이블에 앉은 선배들은 30년 전 군대 이야기, 20년 전 회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작년과 바뀐 것이 없었습니다.
간혹 "이번에 OO이가 임원 승진했단다."라는 이야기가 들렸습니다.
동기들과의 대화는 미래와 세계를 향하고 있었는데,
선배들의 대화는 아직도 20~30년 전 과거 속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술이 거나하게 취한 고참 선배가 일어서서 소주잔을 들며 말했습니다.
"야! 너희들! 내가 건배사 할 테니깐 잔 들어봐!"
저희는 남자 6명이 청하 2병을 2시간째 먹고 있었는데 말이지요.
저와 20년 가까이 차이가 날 법한 그 선배에게 제가 말했습니다.
"선배님. 여기 다른 손님들도 있는데, 건배사는 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자 선배는 "그래? 그럼 우리끼리 하지 뭐!"라고 말하며 다음과 같이 소리쳤습니다.
"위하여!"
젊음이 넘치는 대학가의 금요일 저녁,
이제는 현직이 아닌 과거 속에서만 살아가는 고참 선배의 "위하여!" 외침에,
음식점에서는 잠시 정적이 흘렀습니다.
동기 중 나이가 많은 형이 말했습니다.
"우리 나가서 커피나 한 잔 하고 갈까?"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음식점을 나왔습니다.
선배들은 따라 나오며 말했습니다.
"다음 달 총동문회 모임 있다. 꼭 나와라."
집으로 가는 길.
친한 동기가 말했습니다.
"인사야. 너 동문회 활동 열심히 하지 않았어?"
제가 답했습니다.
"예전에는 그랬지. 내가 이 모임의 구성원인 것이 자랑스러웠거든. 그런데 어느덧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동문회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한 때 잘 나가던 과거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더라고. 아무도 미래와 꿈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었어. 나는 성장하는 사람들을 만나러 나왔는데, 동문회 사람들은 '너 몇 학번이야? 어느 회사 다녀?'만 물어봤어. 그래서 나는 총동문회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어."
연말이 다가오며 송년회 자리가 하나씩 생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 팀 송년 모임 자리에서 제가 건배사를 했습니다.
지난 2024년을 되돌아보며 서로를 격려하고, 축하할 내용을 나누었습니다.
딱딱하지 않게 위트와 유머를 최대한 활용했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위하여!" 같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다른 사람들을 위하고 싶다면,
함께 자리하는 사람들이 궁금해하지도 않는 본인의 과거 이야기는 그만하고,
더 나은 미래를 이야기하거나, 아니면 즐거운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저는 "위하여!"라는 건배사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진: 무한도전 회식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