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시작되는 순간
철학이 끝내 알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단순하다. 왜 살아야 하는가, 왜 이 세계는 이토록 이성을 결여한 채 굴러가는가. 어째서 현상학적으로 논리적 모순이 발생하는 지점에서 출현하는 현상들은, 기존 인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고유성을 획득하는가.
흥미롭게도, 논리적으로 모순이 발생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현하는 현상들은 기존 질서에 종속되지 않은 채 드러난다. 다시 말해, 이해되지 않음은 결핍이 아니라 초과다. 이 초과분이 바로 고유성이다. 그렇게, 끝내 해소되지 않는 질문들이 탄생한다.
인간은 그 질문들에 신비라는 이름을 붙이고, 동시에 논리라는 틀을 씌우려 수없이 시도해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과학의 언어로 번역되는 순간, 신비는 급격히 소진되어 버리고, 질문은 어떤 방식으로든 ‘결론’이라는 형태로 봉인된다. 아무리 독특한 현상조차도 잊히는 것이다.
이를테면 영혼이나 신과 같은 ‘존재’를 가정해보자.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명확하다.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대로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전생의 기억이라 불리는 체험이나 놀라울 정도로 정합적인 서사, 혹은 상식을 벗어난 신비한 경험들에 기대어 말한다.
물론 그것들은 거짓일 수도 있고, 착각일 수도 있으며, 무수한 가능성 중 하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성은 언제나 여지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정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그러한 현상들이 ‘발생한다’는 사실 자체다. 그것은 참과 거짓의 판정 이전에, 설명 가능성과 증명의 요구 이전에 이미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철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없다고 결론내리는 태도와, 증명할 수 없지만 있다고 말해버리는 신념 사이에서, 철학은 선택하지 않는다. 다만 묻는다. 왜, 그 현상 앞에서 끝내 “없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인가.
어쩌면 ‘있다’는 판단은 논리의 결과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세계가 끝내 이성에 포섭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모순이 오류가 아니라 세계의 한 방식일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 그래서 철학은 결론에 도달하지 않는다. 대신, 결론에 도달해버리는 사유가 무엇을 잃는지를 끈질기게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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