잉크처럼 스며드는 흔적

지나간 것들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다

by 하진
camera-7680125_1280.jpg ⓒ Pixabay

그건 오래된 필름 끝에서 번져나온 한 방울의 잉크 같다. 처음엔 미세한 얼룩처럼 보였던 것이, 자꾸 빠져나간다.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프레임 전체를 잠식해간다. 이미지는 흐려지고, 경계는 무너진다. 잉크는 말이 닿지 않는 바깥으로 스며들고, 어느 순간부터 그 벗어난 자리에서만 필름은 다시 재생되었다.


무너진 구조, 뒤틀린 리듬 속에서만 재생되는 장면이 있다. 이상하다는 감각은, 오히려, 그것을 쉽게 놓지 못하게 만들었다. 너무 많은 것이 이미 지나갔음을 알아채는 순간, 시간은 기묘하게 늘어나거나 뒤틀린다. 무심히 지나쳤을 장면 앞에 어딘가는 멈춰 선 자리의 공백, 어떤 말은 웃음보다 침묵을 먼저 끌어낸다.


오래전, 의자에 앉아 아무 말 없이 벽을 보고 있던 밤이 있었다. 무슨 말을 건넸어야 했는지, 무슨 감정을 느껴야 했는지조차 잊혀졌지만, 그 침묵만큼은 지금도 또렷하다. 말하지 못한 것들이 아니라, 말해질 수 없었던 것들이 더 오래 남는다. 입 안에서만 맴돌다 끝내 말이 되지 못한 문장들.


그 말들 역시,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사라졌을 것이다. 꺼내는 순간, 놓을 것만 같은 감정이 있다. 표현하는 순간, 증발해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그래서 시간을 멈추듯 머무르던 순간이 있다. 꺼내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꺼낼 수 없었던 것일 뿐. 무언의 형태는 붙잡지 않아도 떠오른다.


의미보다 오래 남고, 설명보다 근접한다. 마치 꿈처럼, 그것은 형태를 가지려는 순간부터 희미해지기 시작한다. 그래서 말하지 않았다. 끝내 말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 혹은 말하지 않고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는 압력이 스며든다. 그건 침묵의 가장자리에서 퍼지는 작은 진동.


언젠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처음부터 꿈이었음을. 그럼에도 여전히 시간은 기묘하게 뒤틀리고, 이미지는 흐려지며, 잉크는 조용히 퍼져나간다. 번지는 무늬는 리듬을 만들지만, 그 리듬조차 불규칙하다. 발화되지 않은 문장은 온기를 남기지 못하고, 오히려 그 사이에 남은 냉기만 오래 지속된다.


#에세이 #산문 #감성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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