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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생각 02화

인간의 자아가 무너지는 과정

상징계의 균열과 정신분석의 연관성

by 하진

※ 읽기 전에 반드시 인지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뇌피셜일 뿐이며, 학계의 의견과는 다소 차이가 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 Pixabay

인간이 상징계적 질서에서 주어진 기표ㅡ정체성ㅡ를 상실했을 때, 스스로를 유지할 수 있는 ‘내면적 구조’가 없다면 주체는 해체될 수밖에 없다. 이 위기 속에서 사회는 어긋난 자들을 병리화・추방함으로써 권력 구조를 강화하지만, 끝내 그 권력 구조의 정점에 선 자마저 타자를 잃고 자멸한다.


결론

나는 회의주의-실증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 사유하면서 오히려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다. 철학하는 사람이 미친 게 아니라, 철학에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살아갈 이유가 없다- 어쩌고 하면서 싸우고 있는데, 그걸 보다가 미치는 게 아닐까 싶다. 아무튼, 결국 아무것도 모른다는 결론에 다다르니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소중한 사람들. 무너질 때 잡을 것은 그게 전부이고, 그것을 지키는 게 인간다운 삶이다. 모든 인간은 조금씩 미쳐있다. 그러니 미쳤다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말해주자. 원래 우리 모두가 조금씩 미쳤다고.



I. 상징계 균열과 대타자의 부재

모든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 상징계에 들어선다. 언어, 규범, 역할, 법, 이름. 우리는 그것들을 통해서만 ‘나’로 불릴 수 있다. 하지만 이 구조는 전능하지 않다. 어느 순간, 어떤 주체는 상징계가 실은 허구적 구조물이며,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 자리라는 진실에 다다른다. 라캉은 이것이야말로 광기의 문턱이라고 말한다.


이전까지 “나를 판단하는 것”, “의미를 보장해주는 것”이라 믿었던 질서가 사실은 비어 있는 구조라는 걸 알게 되는 주체는 선택의 기로에 선다. 상징계가 붕괴한 자리에서 철학은 살기 위한 수단이 된다. 더는 보증되지 않는 세계에서, 주체는 스스로의 근거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II. 무의식과 민감한 주체

모든 주체가 붕괴를 감지하는 것은 아니다. 보통 상징계의 허구성을 감지하지 못하거나, 감지하더라도 무시하거나 망각함으로써 살아간다. 이를 기준으로 지위를 가르려는 의도는 전혀 없다. 애초에 누군가는 집단생활에 잘 적응해야 했으며, 누군가는 그 와중에도 한 발짝 뒤에서 옳고/그름을 판단해야 했다.


일부 주체는 뒤틀림, 기표의 틈, 반복 속의 어긋남, 의미 생성의 실패를 감지한다. 또한, 일상의 대화 속에 감춰진 위선, 정당화된 폭력, 억압된 욕망의 울림에 반응한다. 그러나 증명되지 않고, 확신할 수 없는 상태로만잔존한다. 따라서, 주체의 민감성은 존중받지 못한 채 쉽게 병리로 간주된다.


이성과 논리 아래 세워진 질서는 이러한 주체들을 배제했다. 그 결과, 계보는 계속 끊겨왔을 것이며, 말해지지 않는 것은 증명되지 않다는 이유로 지워지고, 존재를 확인받지 못한 주체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고, 의미화나 구조화로 이어지지 않아서 쉽게 무너졌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체는 규칙과 항상 어긋나기 마련이다. 첫 번째는 체계나 현실의 위선을 드러내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그것이 말해지지 않고 확신할 수 없는 방식으로만 전해지기 때문이고, 세 번째는 그러한 주체가 상징계의 허구를 연상시키므로, 그를 보는 시선에 불편함이 투영되기 때문이다.


말해지지 않는 것의 혼란스러움은 다수에게 불쾌감을 선사하지만, 이런 주체들이 사라진다면 진실을 고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어진다. 그 결과, 체계는 더욱 견고해지고, 인간은 기계가 되고, 어떠한 의견도 쉽사리 꺼낼 수 없을 것이며, 그들이 사라진 뒤는 결국 또 다른 희생자가 빈 자리를 매운다.


III. 초자아의 폭력

어떤 주체는 진실을 향해 나아가지만, 대타자의 부재 말고는 딱히 알만한 건 없다. 그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발생한다. 라캉은 욕망에 충실하라고 말하나, 사실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함으로 구성된 것이며, 그 대타자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욕망은 스스로를 향해 무너진다.


여기서 초자아(Superego)가 등장하는데, 내게 초자아는 이 모든 비극의 구조적 근원처럼 보인다. 법의 부재를 덮으려는 과잉명령의 잔혹한 목소리가 “너는 욕망해야 하지만, 그 욕망은 금지되었다.”는 무한 딜레마를 만들어내고, 주체를 고문하기 때문이다.


이 고통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진리와 세계가 자신의 내부에 있음을 확신하는 구조를 세우는 것이다. 이는 붕괴된 세계 속에서 유일한 안전장치가 되고, 그들의 세계를 부정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확실한것은 적어도 지금의 체계는 이러한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다.


IV. 글쓰기와 철학의 공통점

철학은 생존노트다. 진리를 찾으려는 시도는 답 없다고 느낀 것의 반복, 그것에 대한 반박, 또 그것을 반박하는 행위와 함께 별 진전 없는 사유로 나아간다. 그리고, 거기서더 나아간 자들은 실재에서 멈춘다. 철학은 기표의 실패를 감내하는 언어이자, 살기 위한 유예 행위로 활용하는 기표생성 장치다.


한편, 어떤 주체는 글쓰기를 선택한다. 글쓰기는 욕망을 상징계 내에서 접촉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와 같다. 타자에게 언젠가는 닿을 것이라는 기대감. 인간이, 글을 쓰는 이유는 말하지 않으면 미치기 때문에 쓴다. 그만큼 침묵과 고립은 무의식에 각인되어 가장 큰 스트레스로 남는다.


주체는 결코 타자 없이 살아갈 수 없으며, 인정이나 사랑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삶의 의미가 없으면 쉽게 무너진다. 애초에 진리를 찾고자 한 이유. 그것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정작, 이성은 가장 중요한 것들을 잊게 만들었다.


이타심은 동정이, 연애는 계산이, 관계는 손해와 이득으로 환산된다. 이성의 체계 위에 세워진 세계는 정녕 행복한가?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울한가. 왜, 기술이 진보할수록 자살율은 높아지는가.


V. 인공지능과 인간의 자아

인공지능의 가장 큰 문제는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인간이 자신을 누구로 여겨야 할지 정체성의 거처를 상실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고정된 자아상과 상징적 질서 속 역할 위에서 살아왔다.


“나는 교사다,” “나는 엄마다”, 혹은 초자아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을 때, 지금까지는 사회적 체계와 질서가 보장되는 세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조차 불안정하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계산하고, 더 빠르게 번역하고, 더 창의적으로 창작하기 시작하면, 모든 정체성은 무력해진다.


상징계 속에서 부여된 기표로서의 ‘나’, 즉 자아상은 기술의 진보 앞에서 기능을 상실한다. 주체는 어떻게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기표는 사라졌고, 대타자는 침묵했고, 자아상은 붕괴할 위험에 놓여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내면적 자문 구조다. 즉, 타자나 기표가 아닌 자기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응답하는 능력이다.


다시 말해, 상징의 붕괴 이후에도 자기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비-기표적 구조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타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을 피하는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권력은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언제나 희생자를 필요로 하나, 정상성이라는 이름의 피라미드는 꼭대기로 올라갈수록 누군가를계단 삼아야만 한다. 그러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선 왕은 끝내 모든 노예를 제거한 후, 스스로 죽는다. 왜냐하면 왕은 노예 없이는 존재할 수 없고, 권력은 타자 없이는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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