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난 떠남과 지금의 떠남에 대해
새로운 시작에 앞서 왜 기존의 것들을 완전히 단절하고 또 떠나야만 하는 걸까?
인간은 구획을 나누는 걸 참 좋아한다. 마치 계획도시를 떠올렸을 때 질서 정연하게 모여있는 건물들과 가지런하게 나있는 길들처럼. 날짜, 시간, 다양한 공간들. 모두 연속적인 시공간 속에서 무언가를 나누려고 하는 인간의 시도들이다. 개인의 삶은 어떤 지점으로부터 구분 질 수 있는 걸까? 자연적으로는 탄생과 죽음으로밖에 나눠져있지 않은데 말이다. 이는 창업의 마무리와 새로운 시작 사이에 있는 나에게 다가온 막연한 질문이었다. 이 질문을 앞에 두고 곰곰이 떠올려보면, 나에게 삶을 나누는 특정 지점은 주로 ‘떠나는 것’이었다. ‘떠남을 위한 출발’은 삶의 어떤 국면의 마무리와 시작을 가르는 지점의 갈피가 되어주었다.
“왜 떠나야 하는지, 왜 그 자리에서 더는 버틸 수 없을 것 같은지 그들이 항상 아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어렴풋하지만 거의 육체적인 느낌으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음을 안다. 출발은 그것이 도망일 때조차도 설명할 수 없는 필연의 명령으로 부과된다.”
클레르 마랭 <제자리에 있다는 것>
나에게 가장 상징적인 떠남은, 지금으로부터 8년 전, 23살 때 있었다. 그 당시에도 최근 몇 년과 비슷하게 나는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지금이 그때보다 더 낫다고 할 수도 있겠다. 지금은 단순한 창업의 마무리지만, 그 당시에는 말 그대로 삶이 끝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7년의 삶은 나에게 점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그 어떤 강렬한 감정도 느낄 수 없었고, 아주 고요하게 흐르는 절망감과 무력감만이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이었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여온 가정사 덕분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숱하게 좌절스런 상황에 놓여 있던 사람들이 무릇 그러하듯, 어떤 노력을 한다 해도 지금의 상황을 바꿀 수 없다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점차 악화만 되어가다가, 결국 펑. 하고 터져버렸다. 어느 날 참고 참다가 아빠의 멱살을 잡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그 일을 계기로 가족 모두가 나의 마음이 어느샌가 모두 닳아버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마치 유배에 보내지는 죄인처럼, 70일 동안 유럽으로 떠나게 되었다.
“자유는 찢겨 나오는 일이며, 선재하는 것의 파괴를 통한 해방이다.”
“단절하고 떠난다는 것은 자신에게 기회를 주고, 은혜를 베풀고, 구원하는 일이다."
클레르 마랭 <제자리에 있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 수 있지만, 홀로 여행 한 번 해본 적 없던 23살의 나에게 70일은 긴 시간이었다. 모든 것을 단절하고 처음 당도하는 세상에 내 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당시 모든 감정의 진폭이 줄어든 나에게 갑자기 훅 들어온 것은 떠남에 대한 강렬한 공포였다.
떠난다는 것을 체감하는 순간이 몇 개 있었다.
홀로 마중 나왔던 엄마. 몸도 마음도 파리했던 엄마가 전해준 편지를 읽으면서 내가 많은 것들을 끊어내고 떠나왔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처음으로 도착한 영국의 공항을 나서서 숙소까지 가는 길, 피부에 닿는 차가운 공기를 느끼며 처음으로 나를 새로운 세상에 내던진다는 의미에 대해서 알았다.
하지만 모든 처음이 그렇듯, 이 과정들을 거치면서 떠남에 대한 공포는 점차 줄어들었고,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나를 감각하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되었다.
장소 뿐 아니라, 떠난 곳에서의 나는 참 새로운 인물이었다.
즉, 그 모든 과정에서 새로운 시작을 위한 떠남이라는 것은, ‘응당 스스로에게 기대되는 장소가 아니라 다른 곳에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구현한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다. 그때 단순히 유럽이 누구나 꿈꾸는 멋진 여행지이자 장소였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한국이 아닌 이러한 생경한 곳에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새로 시작하는 것에 큰 힘을 주었다. 특정 틀에 갇혀있던 나의 정체성을 꺼내서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확장하게 된다. 그렇게 새로 구한 널찍한 틀을 장착했다. 그러한 정체성을 가지고 한국에 돌아와서 모든 것을 천천히 새로 시작했었다.
“단 하나의 존재 방식에 갇히지 않고 다른 삶을 실험하는 사치를 허용하는 것”
클레르 마랭 <제자리에 있다는 것>
나는 지금도 어떤 의미로는 떠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여행이 아니라 정신적 여행. 떠난 곳에서 나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 스타트업 대표라는 틀을 떠나서 실무자로, 하나의 역할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역할을 해보는 것으로, 기존의 팀이 아닌 새로운 팀에서 기여를 해보는 것으로, 홀로 애쓰던 사람에서 누군가를 돕는 사람으로. 당연하게 기대되었던 것들에서 완전히 떠나서 전혀 다른 곳에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것은 나의 정체성에 자유를 가져다준다.
다음엔 또 어디로 떠나게 될까? 일단은 지금 떠나서 당도한 곳을 좀 즐길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