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하면 나타나는 다양한 이너비전(inner vision)
명상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이완되어 매우 편안해집니다. 마치 의식이 깨어있는 잠을 자는 것과 비슷한 상태가 됩니다. 이때 사람마다 개인차가 있지만 대부분 다양한 '이너비전(inner vision)'을 경험합니다. 가물거리는 다양한 색깔의 빛이나 *쿤달리니 에너지를 가시적으로 인지하는 것 이외에도 많은 이너비전 체험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생생한 꿈을 꿀 때와 비슷한 경험입니다. 나도 모르게 펼쳐진 마음속 4D 영화관에서 매우 신비롭거나 또는 기괴한 체험을 하게 되죠. 그것이 개인의 현실과 연관성이 있다면 그 신비로움이나 기괴함은 가중됩니다. 명상할 때 경험된 이너비전 중 실제 내담자 사례를 몇 가지 소개하려고 합니다.
*쿤달리니 에너지: 인도 요가에서 얘기하는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에너지를 말합니다. 생명력이나 치유력과 관련 있다고 보기도 합니다. 대개 배꼽 아래 하단전 부위에 잠들어있다가 쿤달리니가 활성화되면 어느덧 정수리에 닿는다고 하죠. 쿤달리니가 활성화되는 모습은 똬리를 튼 뱀이 기둥을 오르는 것과 닮았다고 하여 나선형 뱀의 형상으로 자주 표현됩니다. 이 글에서는 쿤달리니에 대한 상세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므로 ‘기감’ 정도로 인지해도 무방합니다.
! 각 케이스는 경험의 생생함을 더하기 위해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했습니다. 또한 내담자의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기 위해 몇 가지 요소들은 각색되었으나 최대한 표현적 유사성을 유지하려고 했습니다.
case 1. 선녀들의 정원
어느 사찰에 방문했다. 유난히 사람이 적고 고즈넉하여 마음이 편안했다. 어간문으로 따스한 볕이 드는 전각에 들어가 명상을 시작했다. 문득 선녀들이 가꾸는 정원에 있었다.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 선녀들은 걷지 않고 공중을 떠다니듯 했다. 각자 손에는 모양이 특이한 장식품을 들고 있었고, 그것으로 자신이 맡은 꽃을 가꾸는데 여념이 없었다. 한 선녀를 따라가 보려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 그런지 살펴보니 나는 꽃봉오리였다. 가만히 기다리는 것 밖에 할 것이 없어 그렇게 있었다. 이윽고 한 선녀가 선선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손에 든 장식품은 주전자였는지 꽃봉오리인 나에게 가만히 물을 부어주었다. 나는 그 물을 맞고 금세 자라났는데, 꽃잎을 열고 보니 연꽃이었다. 진흙 한 점 없는 허공에 핀 연꽃이 참 아름다웠다. 꽃의 줄기를 따라 내려가보니 사찰에 앉아 명상 중인 몸이 보였다. 줄기는 그 몸의 정수리에서 나오고 있었다.
case 2. 그림자 존재와 악어의 덫
문득 그림자 같은 검은색 몸을 한 사람이 나타났다. 머리 뒤에 황금빛 후광이 번쩍였으나 기운이 형형하고 살기가 있어 이상했다. 마치 살아있는 사람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는데, 요가할 때 입는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내 그 존재는 아주 어려운 요가 동작을 하기 시작했다. 한쪽 팔로만 몸을 지탱하기도 하고, 발이 하늘로 솟았다가 이내 두 발로 서있기도 했다. 점점 그 모습에 압도당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고 무서웠지만 요가 보여주기는 계속되었고 명상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다음날 같은 시간, 이번에는 문득 악어떼가 가득한 강가에 와있었다. 나는 아주 작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분명 명상하고 있는 것이 나인데 소년 역시 분명히 나였다. 의아할 새도 없이 악어들이 일제히 주둥이를 활짝 벌렸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가장 가까이 있는 악어에게 잡아먹힐 것 같아 무서웠다. 이번에는 도와달라는 마음의 외침 없이 무기력하게 기다렸다. 악어가 점점 가까워졌다. 눈물이 났다. 두려움이 아닌 안타까움의 눈물이었다.
case 3. 현실과의 동시성
명상을 할 때 무표정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얼굴만 동동 뜬 홀로그램 같았다. 전부 모르는 얼굴이었고, 처음엔 아무렇지 않다가 점점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몸에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어느 날은 역시 한 얼굴이 보였다. 젊은 여자였고, 형상이 너무 어지러워 보고 있기가 힘들었다. 누군지 궁금해서 찬찬히 살펴보니 기억에 있는 얼굴이었다. 가깝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지인인데, 왜 그런 모습인지 궁금했다. 그러자 목을 매는 모습이 보였다. 너무 놀라 소름이 끼쳤다. 분명 며칠 전까지 연락을 주고받기도 하고 소식을 전해 듣기도 했던 사람이라 더 소름 끼치게 느껴졌다. 최대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고 애쓰며 명상을 이어갔다.
우리의 뇌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과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실 상상이나 생각도 뇌의 입장에서는 현실인 셈이죠. 위의 세 가지 사례가 각각 어떤 상황과 스토리를 담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첫 번째 사례의 내담자는 아름다운 이너비전을 경험한 후 새로운 지각능력이 개발된 듯 만물의 에너지를 감각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미세한 기운은 물론 자연 현상을 감지하는 능력이 생겼죠. 또 이너비전이 매우 잦고 구체적인 시각화로 진화했습니다. 좋은지 나쁜지는 알 수 없지만 내담자는 이 현상을 꽤나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다채로운 삶을 살게 된 것이 즐거웠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후에는 이 신비로운 감각이 새로운 고통의 요소가 되어 꽤 힘든 나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결국 마음에 들었던 이 초능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보다 안정된 마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을 지속했습니다. 마음이 안정될수록 이런 유형의 이너비전은 사그라들었고, 기운을 느끼는 감각도 점차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불안정하던 기능이 안정될수록 점차 직관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몸과 마음을 통찰하고, 모든 현실에 현명하게 대처하며 해야 할 일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있죠. 이것은 매우 지혜로운 삶입니다.
두 번째 사례의 내담자는 당시 금전적 사기를 당하는 과정에 있었습니다. 결국 사기를 막지 못했고, 큰 금전적 손실이 일어난 뒤에야 정황을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몸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무사했습니다. 평소 규칙적이고 절제된 삶, 청렴한 삶을 살고 있다며 자부하던 내담자는 크게 무너졌습니다. 결국 자신의 욕심과 불찰로 빚어진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 욕심은 그득한데 그것을 억지로 억누르며 절제하는 삶을 사는 것은 더 이상 현명한 방법이 아님을 깨달았죠. 어쩌면 스스로의 목숨까지도 위험에 처할 뻔했습니다. 임제록에는 ‘살불살조’라는 말이 나옵니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는 뜻입니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관념에 집착함을 경계하고 미혹에서 벗어나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청렴한 삶의 형태도 마음이 함께 청렴하지 못하다면 관념에 불과합니다. 내담자는 스스로를 새장에서 꺼내 현실과 자신의 참 마음을 직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세 번째 사례의 내담자가 본 얼굴은 실제 죽은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내담자가 이너비전을 보기 전날에 일이 벌어졌던 것입니다. 지인은 개인적인 이유로 자살했고, 그 사람의 가까운 이가 상황을 정리하고 장례를 치르기까지 소식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에 모르고 있었던 것이죠. 내담자는 이 사실을 알고 매우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죽음 자체도 매우 충격이었으나 이너비전에 더욱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동안 명상을 시도하기 어려웠죠. 이처럼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의 동시성을 이너비전으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담자가 본 다른 얼굴들은 전혀 모르는 얼굴이니 달리 확인할 길은 없었습니다. 다만 이후에도 종종 아는 얼굴에 한해서는 비슷한 이너비전이 나타났고, 자애 명상과 만트라 기도, 강력한 그라운딩을 유도하는 힐링을 통해 반복되는 이너비전 현상에서 벗어났습니다.
이처럼 개인이 경험하는 이너비전은 신묘한 방식으로 또 다른 현실을 마주하게 합니다. 눈을 뜨고 겪는 현실과 눈을 감고 겪는 현실의 괴리가 클수록 고통은 심화될 가능성이 커지는데, 이때 마음이 추구하는 방향성은 스스로가 정하게 됩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 마음이 곧 현실이고, 현실은 곧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의 유기적인 연결성은 아주 미묘합니다. 이 에너지의 흐름을 바르게 통찰한다면 모든 현상은 힌트이자 메시지가 됩니다. 자신의 마음을 어떤 세상에 살게 하고 있나요?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에게 유의미한 영감이 홀씨처럼 가닿기를 바라며
- 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