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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그림 Nov 09. 2023

주민센터 공무원, 꼰대 극복

세상에 꼰대가 많다. 이해하고 넘어가려 하지만, 꼰대라고 정의될 수 있는 사람들의 수도 양상도 많다. 꼰대의 정의는 무엇일까? 친절의 반대 개념이다. 나는 이렇게 힘들었으니 너도 이렇게 해야지, 내 마음에 안 들 때는 지위가 낮은 너 탓을 해야지, 뭐 이런 것들. 들여다보면 친절하지 않고 면박을 주거나 하면서 자기의 경험도 그러했음으로 탓을 돌리는 사람들이 꼰대인 것 같다.    

           

이런 꼰대들을 우리는 계속 마주할 것이며 큰 손해를 보고 살아가게 된다. 꼰대들은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데에만 목적을 두고 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협력을 잘 할 수 없는 존재들인 것 같다. 다른 사람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나, 조금씩 서로 진심어린 도움을 주고 받아야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는 존재들인 우리들은 꼰대들로 인해 마음과 능력에 타격을 받고 살아가게 마련이다. 꼰대들을 상대하다보면 일도 팍팍한데, 사람까지 이렇게 기를 뺏어가는 taker 라면 어떻게 회사다니나, 싶은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들 것이다.


이런 꼰대들에 대처하는 방법, 뭐가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꼰대들에게 잘 보이려 한다. 나도 직급이 올라가면, 나도 나이가 많아지고 돈이 많아지면 똑같이 되는 줄도 모르고 충성한다. 조금 다른 방법을 시도해본 적이 있다. 꼰대에게 진심 어린 위로나 감사를 전해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법은 잘 먹히지 않았다. 그들의 비어 있는 마음의 공간은 생각보다 너무나 커서, 별로 감사해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또 제자리로 돌아와 괴롭히는 것을 경험 했다. 그렇기에 나의 기를 빨리면서 일하지 않기 위해서는 이들과 약간의 심리적 거리를 두는 것이 좋다. 내 마음 속으로 긍휼하게 여기며, ‘그래, 너가 제일 힘들겠지’라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틱틱거리는 태도에 대해서는 비난이 많으므로 내적으로 상처받지 않는 근육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왜 이것밖에 못하냐는’ 말이 일상인 그들에게는 ‘그래, 네가 인정이 필요했는데 그만큼 누군가 채워주지 못한 상태구나’라고 인지하는 것이 좋다. 내가 그 인정을 채워주려고까진 생각하지 않아도 되며 진심으로 칭찬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에만 말을 건네면 된다.      


한편으론 자기 자신에 대한 토닥임이 필수다. 그들을 위로하다보면 왜 이 이상 하지 못했냐는 그들의 화법에 상처받을 수 있다. 특히나 인정을 위해 일하는 많은 직장인들의 경우 인정받지 못했다는 괴로움을 느끼기가 쉬운 것이 바로 이 꼰대들을 상대하는 경우이다. 이럴 때는 자기가 얻은 것을 생각해야 한다. 라틴어로 quid pro quo라는 말이 있다. 내가 대가로 준 것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이다. 내가 꼰대에게 잘 대처하는 에너지를 내어주고 대신 일터에서 약간의 일에 대한 지식이든 불편하지 않은 그들과의 관계든 또 그런 그들을 참아주는 하나님의 상급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얻었다는 뜻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직장에서는 이 quid pro quo가 매일 같이 일어난다는 것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전쟁같은 직장이라는 것이 때로는 지겹고 사표 쓰고 싶어도 다가오는 주말을 정말 감사하며 오히려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이들에 대처하는 방법은 결국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이다. 아무도 날 슬프게 할 수는 없어, 나는 내 태도를 스스로 선택할 거야! 라고 결심하고 일한다면, 그런 직장 속 어려움 중에도 하나님이 나의 모습을 너무나 기뻐하고 칭찬하실 거라는 생각을 한다면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마음을 지키고 일을 열심히 함으로써 오늘 하루 내 자신이 꼰대가 되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가장 좋은 상이 아닐까. 내 인생을 잘 산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지만 그럼에도 잘 산 하루는 큰 하나님께 큰 영광이 되는 것 같다. 이전 직장에서 꼰대를 돌아보다보니 얻는 것도 있었다. 내가 그 시절 훈련받았던 가장 중요한 덕목은 ‘홀로서기’였던 것 같다. 언제나 가족이 나를 도와주는 데 익숙했던 나는 그 시절 ‘이리떼’로부터 나를 지키고 말씀 앞에 서며 철저히 혼자서 상황을 이겨나가는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그 훈련이 끝나자 새로운 환경이 또 주어지게 되었다. 힘들었던 시간들이 조금은 내게 부족함이 있었더라도 세상에 대해 꽤나 비관적이어지는 정확한 시선을 얻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사람의 본성에 대해서 철저하게 깨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던 시기였다.     


직장을 옮긴 지금, 그 꼰대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생각이 나기도 한다. 더 악한 꼰대가 되었을까, 그래도 어리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많이 눈감고 넘어가주었던 너. 나이 먹는다고 다 성장하는건 아니랬다. 이전 직장의 사람들도 평안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일 것이다. 썩 기쁜 기도는 아니지만, 너의 건승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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