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발아래로 살얼음이 떠다닌다. 잔잔한 물결을 따라 얼음 조각들이 서로 부딪힌다.
호수였구나.
나의 혼잣말에 너는 고개를 끄덕인다. 너와 나는 호숫가 물 위로 길게 뻗은 낡은 나루터 위에 앉아 있다. 너의 세상을 더 둘러보라는 듯이 네가 나에게 웃어 보인다.
안개가 걷히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새하얀 바위산이 하늘빛 호수를 굽어본다. 등 뒤로는 눈 덮인 하얀 들판이 펼쳐져 있다.
맑고 청명한 하늘이 호수를 감싸 안고 있다. 차가운 공기 중으로 부드러운 햇살이 내려앉는다. 소녀의 손길 같은 햇살. 포근한 겨울이다.
뒤를 돌아보니 호숫가에 작은 오두막집이 보인다. 나무로 지어진 단출한 오두막이다.
내가 사는 곳이야.
내 시선이 향하는 곳을 눈치챈 네가 말한다. 오두막 안이 궁금하지만 나는 더 묻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이 깃든 낡은 지붕에 은은한 햇빛이 물들어 있다. 햇빛은 너의 머리카락 끝에서도 반짝이고, 검은 눈동자에도 스며 있다. 너를 알고 싶다. 너도 나를 알고 싶을까.
잠들었던 호수가 깨어나고 있어.
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거든.
시간도 잠들었던 세상 같아.
나는 호수를 바라보며 대답한다.
맞아, 겨울이 호수를 다독이는 것 같지 않아? 이제 시간이 되었다면서.
네가 차가운 공기를 들이쉬며 말한다. 나는 호수를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겨울이 이토록 맑고 투명한 계절인 것을 느낀 적이 있던가.
물결을 따라 움직이는 얼음 조각들은 유리처럼 맑은 소리를 내며 서로 부딪힌다. 나는 떠나가는 겨울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단단한 얼음 밑에도 물은 흐르고 있었다. 겉이 얼어붙어도 깊은 곳은 여전히 움직이고 있었다.
겨우내 간직한 비밀을 드러내듯 얼음 사이로 수줍게 얼굴을 내보이는 호수에는 파란 하늘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모든 걸 덮어두고 잠들었던 호수.
잠들어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던 호수.
멈춘 듯 고요하게 겨울을 움켜쥔 호수.
이 호수는 얼마나 깊을까.
이리로 와봐. 멋진 걸 보여줄게.
너는 예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킨다.
나루터를 지나 들판으로 걸어간다. 하얀 솜이불을 덮고 숨죽인 채 가로누운 들판이다. 드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새하얀 자작나무 숲으로 들어간다. 나무 사이로 발을 내디딘다. 두껍게 쌓인 눈 밑으로 발이 푹푹 빠져들어 간다.
깊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갈수록 수직으로 뻗은 나무의 높이는 하늘을 찌를 듯하다. 새하얀 눈과 빼곡히 자란 자작나무의 흰 껍질. 이곳은 마치 하얀 새의 깃털 속 세상 같다. 나무껍질의 검은 무늬는 숨 막힐 듯 고요한 순백의 종이 위에 팔을 가로로 흔들며 흩뿌린 먹물 자국 같다. 앞장선 너와 뒤따르는 나. 너와 나의 두 발이 눈 속으로 푹푹 빠져드는 소리가 고요한 숲 속에서 울려 퍼진다.
나무의 숨소리를 들어봐.
네가 뒤돌아보며 말한다.
숨소리라니.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보지만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자작나무 가지는 눈송이의 무게만으로도 휘어질 만큼 가늘고 섬세하다. 거대한 숲을 집어삼킨 냉혹한 계절의 숨결을 저 나무는 어떻게 견디고 있는 걸까.
잘 들어봐. 온 힘을 다해 살아 있는 나무의 숨소리를.
네가 나에게 다가온다. 너의 시선이 나의 시선을 따라온다.
뭐가 보이니.
앙상한 가지.
나는 무심코 대답한다.
살아있기 위해 잠시 멈춘 거야. 나무는 겨울로부터 도망치지도 않고, 겨울과 맞서 싸우지도 않아. 그저 수피로 감싼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온 힘을 다해 살아있는 것뿐이야.
나무는 도망칠 수도, 싸울 수도 없다.
추위를 모아야 하는 나무들이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려 너의 얼굴을 바라본다. 추위를 모은다는 건 무슨 말일까.
하얀 나무를 향해 손을 뻗는다. 가냘픈 가지를 한 움큼 쥐고 의연하게 서 있는 나무의 기둥을 매만진다. 종잇장처럼 얇은 겹겹의 껍질이 손끝에서 바스락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