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5

소설 연재

by 바달


꿈은 과거가 없다. 꿈속에서 자신이 왜 거기에 있는지, 어떻게 그곳에 도달했는지 묻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꿈은 과거 없이도 존재한다. 그것이 꿈의 해방감이다.

현실은 그럴 수 없다. 현실이 있다면 그곳에 이르기까지의 과거도 있다. 꿈에서 깨어나는 것은 지금에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시간을 들이마시고 소화해 내는 일이다.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설이는 두렵도록 거대한 기억들을 다시 들이쉬었다. 눈앞에는 자신의 여윈 두 다리가 놓여 있었다.

*


승강기 운행 중지 안내

갑작스러운 고장으로 인해 승강기 운행이 일시 중지되오니 많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건물에 하나뿐인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 있었다. 화성학 시험 시작은 오전 11시. 설이는 시계를 확인했다. 10시 53분이었다. 강의실은 5층. 걸어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설이는 난간을 붙잡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무거운 오른쪽 다리를 들어 한 계단 위에 올려놓고, 이어서 왼쪽 다리를 들어 그다음 계단에 올려놓았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이 설이를 앞질렀다. 설이는 사고(思考)를 차단하듯 시야를 좁혀 눈앞에 놓인 계단을 보았다. 당장 위로 내딛는 자신의 발걸음에 집중해야 했다.

도시가 전진하는 속도는 매일 더 빠르게 느껴졌고, 강의실은 하루하루 더 멀게 느껴졌다. 하루치의 언덕을 오른 설이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나날이 더 가팔라지는 경사뿐이었다.

3층. 한 계단도 더 오를 수 없을 만큼 다리가 무겁게 느껴졌다. 설이는 모래주머니로 변해버린 듯한 오른발을 고관절 힘으로 끌어올렸다. 복도 벽에 몸을 기대어 섰다. 주저앉고 싶었지만, 다시 일어설 자신이 없었다. 숨이 차는데 원하는 만큼 공기를 깊게 들이쉴 수가 없었다. 호흡도 근육이 하는 일이었던가.

복도와 계단에는 더 이상 인기척이 없었다. 설이는 다시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12분. 학생들은 모두 각자의 강의실로 들어간 뒤였다.

설이는 다시 계단을 올랐다. 왼쪽 다리를 한 계단 위에 올리고, 몸을 비틀어 오른쪽 다리를 끌어당겼다.

한 발, 한 발.

정신이 아득해질 때쯤에서야 5층에 도착해 있었다. 복도를 건너 강의실까지 걸어갈 힘이 없었다. 설이는 그대로 계단 위에 주저앉았다. 다리 힘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11시 27분. 이제는 몸을 일으킬 수 있을 것 같았다. 팔을 뻗어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난간에 매달린 채로 몸을 비틀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 다시 계단에 주저앉았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설이는 온 힘을 다해 다시 난간에 매달렸다. 이리저리 비틀어댄 끝에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 이마에서 흐른 땀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침내 강의실 앞에 도달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시험 감독을 하던 교수님이 깜짝 놀라 설이를 바라보았다.

“학생은 왜 지금 와?”

시험 문제를 풀고 있던 학생들도 일제히 고개를 들어 설이를 바라보았다.

“죄송… 합니다. 엘리베이터가…”

“… 학생, 이름은?”

“김설입니다.”

“아, 아픈 학생이구나. 저기 빈자리 가서 앉아요.”

11시 37분. 시험 시간은 끝나가고 있었다.

주어진 화음 기호와 소프라노 성부에 따라 4 성부의 화성진행을 완성하시오.

오선 보표에 소프라노 파트만 있었다. 팔다리 없이 노래하는 선율처럼. 화음 기호라는 의도된 길로 오류 없이 걸을 알토와 테너와 베이스 성부를 만들어야 했다. 설이는 오른손에 연필을 쥐었다. 연필을 쥐었다기보다는 엄지와 검지 사이에 기대어 놓은 것에 가까웠다.

단순 암기와 달리 화성학은 연필 없이 공부하기 어려웠다. 네 개의 성부가 서로 긁힘 없이 가야 하는 길. 경우의 수가 많았다. 악보에 음표로 찍은 점은 선율이라는 선이 되어, 음악의 시공간에서 수시로 엉켰다.

음표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손가락 사이에 힘없이 껴 있는 연필로 그린 동그라미와 선은 흐릿하고 구불구불했다.

“자, 이제 다들 그만.”

11시 50분. 설이가 완성한 것은 고작 네 마디의 화성뿐이었다. 아직 열두 마디가 남아있었다.

“거기 학생은 엘리베이터 고장 때문에 늦었다는 거지? 몸이 불편한 학생이니까 특별히 시간을 더 주겠습니다. 다른 학생들은 시험지 제출하고 나가면 됩니다.”

강의실이 어수선해졌다. 앞으로 걸어 나가는 학생들의 불만스러운 시선을 느꼈다. 설이는 고개를 숙이고 다시 연필을 손에 끼웠다.

“12시 반까지 시간을 주겠습니다. 그때까지 푸세요.”

교수님으로서는 혹시 있을지 모르는 이의제기로 인한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점심시간까지 줄여가며 베푼 호의였다. 설이는 감사의 의미로 고개를 짧게 숙였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이를 이해해 주곤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빠짐없이 치열했던 강의실이었다. 갑작스러운 엘리베이터 고장으로 늦은, 아직 장애 판정을 받지 않은 학생에게, 얼마만큼의 추가 시간을 부여해야 하는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없었다. 끊임없이 사람들의 선심에 기대야 하는 대학 생활에 지쳐가고 있었다.

12시 30분. 설이는 시험지를 제출했다. 그러나 그 시험지가 자신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설이는 알고 있었다.

이젠 올라왔던 계단을 다시 내려가야 했다. 몇 년 동안 무심히 오르내리던 계단이었다.

오른 다리에 힘이 제대로 실리지 않았다. 왼발을 내디디는 순간 오른발이 몸의 체중을 견딜 수 있을까. 왼발을 조심스럽게 들어 한 계단 아래로 내렸다. 몸이 아래쪽으로 쏠리려는 찰나에 급히 난간을 잡았다. 굴러 떨어지면 큰 사고가 될 거라는 생각에 식은땀이 났다.

“점심 뭐 먹을래?”

“간단한 거. 나 2시에 또 시험 있어.”

절벽에 서 있는 듯한 설이 옆으로 학생 둘이 사소한 대화를 나누며 지나치고 있었다. 한 학생이 고개를 돌려 난간을 붙들고 서 있는 설이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설이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저 좀 도와주실 수 있나요?”

다른 학생도 고개를 돌려 설이를 보았다.

“어떻게 도와드려야 되죠? 부축해 드리면 될까요?”

둘 중 한 학생이 다가와 설이를 부축하기 시작했다. 다른 학생은 시험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 한다며 서둘러 인사하고 내려갔다.

부축을 받으며 온 정신을 두 발에 집중했다. 시험을 마친 홀가분함으로 이 계단을 내려갔을 다른 이들과 달리, 자신만 여전히 끝나지 않은 시험을 치르고 있는 기분이었다. 강의실에서 풀던 화성학 문제보다도 이 계단이 설이에게는 더 어려웠다.

벼랑 끝에서 불현듯 솟아난 걱정은 연주 수업 때 신어야 하는 구두에 대한 것이었다. 운동화를 신고도 균형을 잡지 못하는 이 다리로, 어떻게 구두를 신고 무대에 오른단 말인가. 이제 설이가 걱정해야 할 일은 어떻게 피아노를 쳐야 할지가 아니라 어떻게 피아노까지 걸어갈지였다.

힘겹게 1층에 다다랐다. 멀어져 가는 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이상하게도 냉랭한 홀가분함을 느꼈다.

새가 나는 모습은 부럽지만 날지 못하는 인간이 새에게 열등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건강한 사람들을 보며 느끼던 괴로움은 새를 바라보는 듯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 자신은 더 이상 이들과 동일 선상에 서 있지 않았다. 이제는 주어진 인생을 살아야 했다. 땅속으로 짓눌리는 듯한 열등감은 사라지고 작은 부러움만 남아 있었다.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살아온 평생의 삶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이었다. 그것은 표연히 주어진 자유이자 철저한 고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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