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 대하여

어쩌면 그것이 전부였는지도

by 바달


폭풍은 맞서 싸우는 게 아니야. 가만히 웅크리고, 지나가길 기다리는 거야.


계속되는 손목 수술 중에 발목 수술까지 겹쳤던 때였다. 목발을 짚을 수 없으니 휠체어 신세를 졌고, 대부분의 시간을 소파에 누워 지냈다.


가만히 있는 걸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놀 때도 ‘열심히’ 놀아야 하는 성격이었다. 쉴 줄 모르는 분주한 마음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한다.


내 삶은 의미 있어야 한다.


그동안 세워왔던 수많은 가치관 중, 가만히 누워서 견뎌야 했던 4주의 시간에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수심에 잠긴 딸에게 엄마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던져주었다.


“뭘 하려고 하지 말고, 텔레비전이나 봐.

폭풍은 맞서 싸우는 게 아니야.

가만히 웅크리고, 지나가길 기다리는 거야.”


팔다리를 다 못 쓰니 밥 먹는 것, 화장실 가는 것, 목욕하는 것, 뭐 하나 쉬운 게 없었다. ‘뇌 빼놓고’ 있어야만 견딜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섰다.


나는 엄마가 던져준 텔레비전 리모컨을 받아 들었다. 〈위기의 주부들〉 8개의 시즌과 〈아앙의 전설〉이라는 애니메이션까지, 대작들을 정주행 했다.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한다.


내 삶은 의미 있어야 한다.


내 삶의 원동력이었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두려움을 접어두면, 거기에 딸려 있던 열정도 하나씩 접혔다.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한 끝에 의학도의 길에 들어섰으나, 나에게 남아 있는 것은 심폐소생술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손목뿐이었다. 친구들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홀로 남아있는 나에겐,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까지도 두렵게 느껴졌다.


그 터널을 통과하고 비로소 혼자서 샤워를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굳게 다짐했다. 스스로 샤워만 할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으로 남겠다고. 그러기 위해서 그 이상의 것은 아무것도 꿈꾸지 않겠다고.


나는 하나의 알을 깨고 나와, 또 한 겹의 껍질로 나를 감쌌다.



스스로 샤워만 할 수 있어도 행복한 사람.


실제로 그랬다. 두 팔을 들어 올려 혼자 머리를 감는 아침마다 행복했다. 하지만 뭐든 과하면 독이다.


영원히 안전할 것만 같던 알 속의 좁은 공간이, 언젠가부터 숨 막히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