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이 싸움은 의무야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묵혀둔 거였어.
세 번의 손목 수술 후에 일상에 복귀했다. 뭘 위해 사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그건 사치스러운 고민이었다. 당장 손을 쓰지 않고 공부할 방법을 찾아야 했고,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진통제와 파스로 하루하루를 견뎠다.
온 정신을 곤두세우고 손목을 조심했다. 하지만 힘줄이 자꾸만 탈구되었다. 척골 충돌로 인한 인대 재파열이었다.
또 한 번의 수술이 잡혔다. ‘지리멸렬’이라는 단어를 그때 처음 이해했다.
꽤 오랫동안 가지 않던 교회 밤기도회에 나갔다. 기도할 힘도 없어서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다 같이 환우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스크린에 스무 명 정도 되는 환우들의 이름이 띄워졌다. 그중엔 내가 아는 이름도 있었다.
나는 도무지 나 하나 아프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가 없었다.
초등학생은 매주 울었다. 세상이 슬퍼서.
그때 문득 떠오른 건, 수년 전에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였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였다. 할머니는 루게릭병이라는 희귀 질환 진단을 받으셨다. 나는 서서히 굳어가는 할머니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도 할머니가 얼마나 힘드실지를 깊이 생각하진 못했다. 할머니를 부양하는 엄마, 아빠의 괴로움을 함께 느끼는 것만으로도 이미 과부하 상태였다.
그런데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펑펑 울었다. 할머니가 불쌍해서도 아니었고, 가족들이 힘들어 보여서도 아니었다. 그냥, 세상이 너무 슬퍼서 울었다.
사라져야 하는 우리의 생이,
스러져야 하는 생명이,
썩어져야 하는 육신이.
두려움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아.
어린 날의 나에게 심긴 두려움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내가 나를 증명해야 해.
나의 삶은 의미 있어야 해.
그것은 인간의 근원적 무력감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손목을 다치면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이 줄어들었다. 그런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느꼈던 괴로움이 무엇이었는지도 깨달았다.
그것은 통증에 대한 것도, 열등감도 아니었다.
인간은 왜 생을 포기해선 안 되는 거야?
몸이 굳어가는 시간을 살아서 견디는 게, 그게 맞는 거야?
생의 무의미함, 죽음의 때에 대해 생각할 작은 틈이 그때부터 벌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이 싸움은 의무야.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이 두려움을 직면해야 한다는 사실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지나고 나왔을 때 내가 어떤 모습이 되어 있을진 알 수 없으나, 더 이상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이 싸움은 나에게 주어진 의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