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리는 글쓰기는 따로 있다
말보다 선명한 마음의 기록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있었을 때, 나는 매일 빼곡한 글씨로 긴 일기를 썼다. 일기장은 감정을 쏟아내는 통로이자, 때로는 감정 쓰레기통이 되기도 했다. 그 자체로도 훌륭한 심리적 치료였다고 생각한다.
그 당시에 내가 느낀 일기의 효능은 이렇다.
첫째, 감정은 물과 같다.
속에 담아두면 고인 물처럼 썩지만, 어디론가 흘려보내면 건강하게 비울 수 있다.
둘째, 솔직함이 곧 휴식이다.
오롯이 나 자신으로 존재할 때,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될 때 우리는 비로소 쉴 수 있다.
때로는 말보다 문장이 더 솔직하다. 그리고 그 솔직한 문장들은 종종 다른 사람을 찌르는 칼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오직 나만을 위한 일기장 위에서는 그런 위험 없이 가면을 벗을 수 있었다. 그것이 내게는 휴식이자 치유였다.
하루에 한 줄을 쓸 수 있다면
일기를 쓰려고 펜을 잡아도 겨우 한 문장을 쓸 수 있던 시기가 찾아왔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있다. 나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험을 했다.
몸이 안 좋으면, 머리가 (좋은 쪽으로) 고생을 한다.
짧지만 힘 있는 일기를 쓰기 위해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소중한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터득한 한 줄 일기를 소개하기에 앞서, 그와 관련된 연구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표현적 글쓰기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James W. Pennebaker는 ‘표현적 글쓰기(Expressive Writing)’의 힘을 믿었다.
그는 ‘치료과정으로서의 감정적 글쓰기(Writing About Emotional Experiences as a Therapeutic Process)’라는 주제로 연구를 진행했다.
실험 참가자들은 나흘 동안 가장 충격적이거나 고통스러웠던 경험에 대해 글을 쓰도록 지시받았다. 반면, 대조군 참가자들은 피상적인 주제에 대해 글을 쓰도록 안내받았다.
표현적 글쓰기에 참여했던 참가자들은 대조군에 비해 감정적, 신체적 면에서 모두 긍정적인 효과를 얻었다.
신체적으로는 면역 기능 향상, 혈압 감소, 폐와 간 기능 개선 등의 효과가 있었고, 사회적·행동적 측면에서는 실직 후 더 빠른 재취업, 작업 기억력 향상 등의 결과도 나타났다.
나를 살리는 글쓰기는 따로 있다
Pennebaker는 이러한 표현적 글쓰기의 효과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보았지만, 처음부터 그의 예측이 들어맞지는 않았다.
가설 1. 억제와 직면
그는 ‘감정의 억제와 직면(Emotional Inhibition and Confrontation)’이라는 관점에서, 억눌러왔던 감정을 마주하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전에 밝힌 적 없는 트라우마에 대해 글을 쓴 사람들, 이미 밝혔던 트라우마에 대해 다시 글을 쓴 사람들, 심지어는 상상 속의 트라우마에 대해 글쓰기를 안내받은 사람들 모두에서 신체 건강의 유의미한 개선이 나타난 것을 보고, 이 가설이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가설 2. 카타르시스
감정적 카타르시스(Emotional Catharsis), 즉 감정을 정화하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놓음으로써(Venting of Negative Feelings) 치유 효과를 얻는다는 가설도 있었다.
하지만 감정만을 쏟아내는 글쓰기는 그리 큰 효과를 주지 않는다는 결과가 나왔다. 게다가 표현적 글쓰기는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부정적인 정서가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난 뒤 얻게 되는 건강상의 이점은 글을 쓴 직후에 느꼈던 부정적인 감정이나 스트레스의 정도와는 별다른 연관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가설 3. 노출
트라우마에 대해 반복적으로 글을 쓰는 것이 일종의 ‘지속 노출 치료(Prolonged Exposure)’처럼 작용할 수 있다는 가설도 있었다. 하지만 연구 결과는 이 가설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각 글쓰기 세션마다 동일한 트라우마 경험을 반복해서 쓴 참가자들과 매번 다른 경험에 대해 쓴 참가자들 모두 긍정적인 효과를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Pennebaker는 참가자들의 글을 분석하기 위해 LIWC(Linguistic Inquiry and Word Count)라는 컴퓨터 기반 텍스트 분석 시스템을 개발하게 된다. 이 시스템으로 글쓰기에서 긍정적인 효과를 얻은 사람들의 글을 분석한 결과, 그 글에는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이 나타났다.
첫째, 긍정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가 더 많이 사용되었고,
둘째, 부정적인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는 적당히 포함되었으며,
셋째, 인지적 사고 과정을 보여주는 단어들의 사용이 증가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인지적 기제를 나타내는 단어란 understand, realize, because, reason 등과 같이 생각의 흐름과 이해 과정을 드러내는 표현들을 의미한다.
이 과정을 통해 표현적 글쓰기가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 밝혀졌다.
이는 ‘생각하다’, ‘이해하다’, ‘알게 되다’, ‘깨닫다’, ‘왜냐하면’, ‘그래서’ 등과 같은 단어들을 말한다. 즉, 단순히 감정을 쏟아내는 것을 넘어서 감정을 인지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무섭다”는 표현보다는 “무서웠지만, 그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와 같이 감정을 분석하고 정리한 문장이 해당된다.
감정을 단순히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 사건이나 감정이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를 구조화하여 서술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과 경험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얻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 중간, 끝이 명확하고, 인과 관계가 느껴지도록 구성된 서술을 의미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글을 쓸 때, 무의미해 보였던 고통에 의미가 부여되고 감정이 재구성되면서 내면의 질서가 회복된다.
내 안의 정신과
소위 몸이 안 좋아서 머리가 고생하던 시기, 나는 이 논문을 알기도 전에 이미 그와 유사한 글쓰기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다.
글쓰기는 진단을 위한 도구일 뿐만 아니라, 처방이자 약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는 나의 생각은 더욱 확고해졌다.
(글이 길어지고 있는 관계로, 제가 실제로 정착하게 된 일기 쓰기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 편에 이어서 소개하겠습니다.)
Reference
Baikie, K. A., & Wilhelm, K. (2005). Emotional and physical health benefits of expressive writing. Advances in Psychiatric Treatment, 11(5), 338–346.
Pennebaker, J. W. (1997). Writing About Emotional Experiences as a Therapeutic Process. Psychological Science, 8(3), 162–1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