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내 안의 정신과 #3

질문하는 힘에 대하여

by 바달



짧은 진료 시간


손을 자유롭게 쓸 수 없었던 나는, 매일 저녁 귀한 물건을 다루듯 조심스레 펜을 들었다. 마치 비싼 심리상담을 예약해 둔 사람처럼, 나는 그 시간을 기다렸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늘 많았다. 하지만 내 손목이 견딜 수 있는 건 고작 한두 문장뿐. 나는 짧은 진료 시간 안에 모든 어려움을 털어놓아야 하는 환자처럼 긴장해 있었다.


무엇을 써야 할지는 항상 미리 생각해 두었다. 하루 종일 진료 대기실에 앉아있던 사람처럼, 의사를 만나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고민했던 환자처럼 말이다. 결국 그 하루 동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한 가지가 자연스레 문장이 되어 나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말을 했고 어떤 말을 들었는지. 내 마음이 두려움이었는지 분노였는지, 슬픔이었는지 좌절이었는지.


그 뒤엔 더 많은 문장을 이어가고 싶었다. 있었던 일을 자세히 털어놓고 싶었다. 이리저리 튀는 산만한 생각들도 전부 쏟아내고 싶었다. 해결 방법을 찾아 방황하는 모든 호흡을 기록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목은 이미 한계에 닿아 있었다. 나는 펜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렇게 나는 밤을 맞이하고 또 하루를 시작했다. 어렵게 써 내려간 한 문장은 내내 마음 한편에 머물렀다.



소중한 골칫덩어리


나에게 너무도 귀한 글씨였기 때문이었을까. 당장 그 문제를 어떻게 벗어날지 고민하지 않았다. 그 문장 자체를 곱씹고 아끼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어떻게’가 아닌 ‘왜’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왜 이것을 힘들어했을까. 유독 힘들게 느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이 정말 본질이었을까.


성격의 문제일까, 상황의 문제일까. 나의 문제일까, 아니면 인간 자체의 문제일까.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문제들을 하나씩 쌓아갔다. 이상하게도 버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골칫거리가 아니라, 논의하고 탐구할 수 있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인생이 버겁다는 막연한 감정도 줄어들었다. 문제의 본질을 고민하다 보면 놀랍게도 한 달 동안 고민한 주제의 개수가 다섯 손가락을 넘기기 어렵다.


예전처럼 일기를 대량으로 쏟아내던 때와는 분명 달랐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조바심을 내려놓자 몇 달, 혹은 몇 년 안에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분량이 많지 않아 지난 걱정들도 다시 들춰볼 수 있었고, 해결된 문제들은 어떻게 풀렸는지도 간단히 적어두었다. 어떤 건 해결된 기쁨에 바로 적어둔 것이었고, 어떤 건 해결된 줄도 모른 채 잊고 지낸 것이었다. 애초에 힘들어했다는 사실 자체를 잊은 것도 있었다.



질문하는 힘


그 과정에서 나는 몇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첫째, 영원한 것은 없다.


영원한 걱정도 없고, 영원한 해결도 없다. 어떤 문제가 나를 평생 괴롭힐 것 같다는 생각은 대부분 착각에 가깝다. 적어두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예상보다 빠르게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해결 역시 완전할 수는 없다. 나는 나약한 인간이다. 한 문제를 넘어서면 한 계단 성장했을 뿐, 곧 새로운 문제와 마주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다.



둘째, 나도 변한다.


반드시 상황이 변해야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해결이라고 느꼈던 순간들을 돌아보면, 상황이 바뀌어서 풀린 경우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은 내 마음가짐이 달라졌거나,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거나, 이전보다 내가 더 성장했기 때문에 해결된 것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해결’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이라 할 수 있겠다.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없을 것 같을 때조차, 문이 완전히 닫힌 것이 아니라 절반쯤만 닫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말은 절반은 열려 있다는 뜻이고, 나는 아직 그 틈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깨달음보다도 더 중요했던 것은 ‘질문하는 힘’이었다.


나는 맞닥뜨린 문제에 대해 ‘어떻게’가 아니라 ‘왜’를 묻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만 생각할 때 ‘왜’라는 질문은 너무 크고 때로는 파괴적이며, 쉽게 허무주의로 빠지곤 한다. 하지만 (이 놈의) 손목 때문에 한 줄로만 적어야 했던 그 간결한 ‘왜’는 오히려 나에게 하나의 놀이처럼 다가왔다.



또 하나, 내가 배운 것은 ‘기다리는 힘’이다.


나는 원래 성격이 몹시 급한 사람이다. 문제가 생기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결해야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습관을 조금 고쳤다. 문제가 생기면 공책에 한 줄 적어두고 억지로 덮었다. 그리고 그저 살아가야 했다.


그 강제된 루틴이 실은 나에게 꼭 필요했던 사유의 방식이었다.


깊은 질문은 앉은자리에서 곧바로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질문할 용기가 필요하고, 그다음에는 그 질문을 안고 살아갈 용기가 필요하다.


스스로 정한 시일 내에 해결하겠다는 오만도 내려놓아야 한다. 그저 질문을 품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아주 뜬금없는 순간에 대답이 찾아오곤 한다.


그 경험을 통해 나는 또다시 질문할 용기를 얻었고, 또다시 기다리는 인내를 배웠다.



과정을 즐기는 사람은 이길 수 없다지 않나.


나는 질문을 떠안고 살아가는 하루하루 자체를 사랑하게 되었다.


그 무거운 하루를 마냥 즐겼다고는 말 못 하겠다. 하지만 그것을 무겁게 사랑하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한 줄짜리 일기에서 시작된 사유는 긴 시간을 지나 소설 쓰기로 이어졌다.



일기가 질문을 품는 일이라면,


소설은 그 질문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일에 가까우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