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허무, 모두의 물음
모두의 이야기
‘아프지 않은 사람 없다’고 위로를 건네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기가 두려울 정도로 위축되어 있었다.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애정 어린 위로조차 애정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부끄럽지만 정말 그랬다. 그 말에 처음엔 화가 났다.
긴 시간을 지나 마음은 끝내 잠잠해졌다.
속으로만 향하던 이기적인 마음엔 초라한 겸손이 찾아왔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소용돌이 같은 질문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때였다.
그렇게 조용한 시간을 지나왔다.
‘안 아픈 사람 없다’는 말을 천천히 소화해 냈다.
질병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나라고 해서, 누구나 겪는 일을 겪지 말아야 한다는 법도 없었다.
그 후에는 이상하리만큼, ‘안 아픈 사람 없다’는 위로의 말이
가슴 깊이 슬펐다.
그때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왜 그 말에 그토록 화가 났었는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아프고 싶지 않았다.
병들고 싶지 않았다.
이건 억울한 일이라고 항변하고 싶었다.
누구나 겪는 일이라고 해서 정당화될 순 없었다.
항복하고 싶지 않았다.
자연의 이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모하게도 세상의 섭리에 대항해 싸우고 싶었다.
단절과 허무
내가 느낀 감정을 간추려보면 두 가지였다.
단절
팔다리가 다 말썽이니 대중교통은커녕, 집 앞 산책도 쉽지 않았다.
손을 못 쓰니 문자나 카톡을 하기도 어려웠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코로나까지 겹쳤다.
찾아와 주는 고마운 친구들도 있었다.
하지만 내 몫의 고독은 내 힘으로 견뎌야 했다.
소중한 친구들에게도 각자의 바쁜 일상이 있었으니까.
세상이 너무 멀쩡해 보였다.
내가 속했던 사회가 나 없이도 멀쩡히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가끔씩 들어가 보던 인스타 계정을 닫아버렸다.
허무
손목 인대를 파열된 채로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다.
그 사이 힘줄은 바스러질 정도로 변성되어 있었다.
손가락 힘줄은 다른 데서 이식해 올 수 있는 조직도 아니었다.
여러 차례 수술을 거쳤지만,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들인 노력에 비례한 보상을 기대하던, 동화 같은 어린 시절이 끝났다.
하루하루 배우고 성장하는 즐거움으로 살아오던 나는 사라지고 없었다.
많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뭔가를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다 늙은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 허송세월을 보냈다.
당시 나는 매일 밤,
내일은 없다고, 오늘이 마지막이었다고,
스스로를 세뇌하며 간신히 잠에 들었다.
지친 나를 위한 마지막 위로였다고 그땐 생각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내일의 부재에 대한 가능성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던 그때 문득,
정말로 내일이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을 가슴으로 느꼈다.
내일이 있다는 말도
내일이 없다는 말도
확신하는 순간 거짓말이 된다.
죽음아, 안녕
세상과의 단절,
생의 허무.
내가 느낀 것은 아주 작은 죽음이었다.
그 미미한 죽음 앞에 무력하게 무너져 내린 나 자신이 싫었다.
진짜 죽음, 거대한 그것이 찾아오는 순간만큼은
밉지 않은 모습을 하고 싶었다.
나는 오만하게도 죽음을 대비하고,
극복하고 싶어 했다.
이것을 정신분석학적으로 반복 강박(Repetition Compulsion)이라고 부른다.
트라우마적 경험을 반복적으로 재현하려는 무의식적 충동.
밤낮으로 마지막을 상상했다.
어떤 아침엔, ‘내일은 없다‘라는 말이
스스로 세뇌한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괴로웠다.
또 어떤 저녁엔,
아무리 연습해 두어도
궁극의 죽음은 끝내 두려우리라는 사실을
고통스럽게 인정했다.
내일의 존재 유무를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강한 통제욕.
그로부터 비롯된 거짓말을 스스로에게 반복하다가
끝내 깨달았다.
내가 매일 밤 되뇌던 것은 실은 두려움이었다.
오랫동안 스스로를 괴롭힌 끝에, 나는 죽음놀이를 관두었다.
대신 비굴하게 한 발 물러서서
허무하게 끝나버릴 것의 가짓수를 줄이며 살아 있으려 애썼다.
너무 깊이 사랑하지 않으려 했다.
너무 노력하지도 않으려 했다.
죽은 듯이 살아 있으려 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수술을 앞둔 날,
루게릭병으로 긴 투병 끝에 돌아가신 할머니를 떠올린 날,
눈가에 실핏줄이 터지도록 울고 집에 돌아온 그날,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아무리 외면해도,
회피해도,
모든 생은 단절과 허무로,
커다란 죽음으로 끝나리라는 사실을.
내가 겪는 일도,
나의 할머니가 겪으신 일도
아주 희귀한 것이었만,
결국 그 본질은 같았다는 사실을.
반격의 시작
더 이상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싸우는 법을 알지 못했지만, 싸워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을 내던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루의 끝에 쓰는 일기가 질문을 품는 일이라면,
소설은 그 질문 속으로 몸을 내던지는 일이다.
나는 할머니가 지나온 고통으로부터 더 이상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 속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한 마음도 없었다.
그저 그렇게,
거대한 이야기 속으로
거센 물살의 흐름 속으로
내 몸을 맡겨보기로 한다.
반격의 때를 기다리며.
추신
읽는 모든 분들이 느끼셨겠지만, 글쓴이는 성격이 매우 극단적인 사람이다.
뭐든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다.
자고로 우리 훌륭하신 어머니께서는
나를 어릴 적부터 미련곰탱이, 예민 양, 엄살대마왕이라 부르곤 하셨다.
이런 내 성격을 스스로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보기로 했다.
생겨 먹은 대로 살아보는 거다.
소설을 시작하면서부터
약간의 자유,
숨통이 트이는 것 같은 옅은 상쾌함을 느낀 것은
실은 이 싸움이
(그 취지와 굉장히 모순되게도)
섭리를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에 나를 내어 맡기는 일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