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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위에 만든 우주 #2

할 수 있어, 하고 싶어

by 바달

1편에 이어서


왜 소설을 썼는지

어째서 그것이 소설이어야만 했는지 보여드리고자 한다.



글에 대하여


먼저 내가 존경하는 작가 한 분을 소개한다.

명료한 논증과 풍부한 상상력으로 수많은 책을 지필 한 작가 C. S. 루이스.


나는 『나니아 연대기』에서 그가 창조해 낸 완성된 세상과 세계관을 동경해 왔다.


어릴 적부터 동경해 온 그의 이야기가

아주 우연히,

내 안에 쌓여 있던 패배의식과 무기력함을

단숨에 부수어 놓았다.


출처: https://pin.it/3r16UBBVw


할 수 있는 일이 남아있다면


우연히 영화관에 갔다.

그리고 우연히, 프로이트와 C. S. 루이스의 대화를 다룬 영화 《프로이트의 라스트 세션》을 보았다.

그리고 또 우연히, 그의 자서전을 사서 읽었다.


그렇게 알게 된 것이 있었다.


그는 엄지의 마디를 굽히지 못하는 장애가 있었다.

뭔가 만들기를 좋아했지만, 오리고 붙이는 것은 할 수 없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배와 집과 기관차’를 만들고 싶었지만,

망가뜨린 가위와 실패한 종이 조각만 싸옇갔다.


그러나 그는 서서히 깨달았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체의 한계가

오히려 축복이었다는 사실을.



글자의 힘은 무궁무진해.


그는 어릴 적부터 가위질이나 종이접기 대신 글을 쓰며 놀았다.


동물 나라를 만들고, 그 속에 마을과 성을 쌓았다.

세상을 만들고, 인물을 만들고, 살아 움직이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그렇게 그는 깨달았다.

종이로는 오려 만들 수 없는 것들을,

글로는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나도 어릴 적부터 만드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림 그리고, 오려 붙이고, 뜨개질하고, 십자수를 하며

끊임없이 손을 움직여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손목을 다친 뒤에는

무엇을 하며 살아 있음을 느껴야 하는지 알지 못해

좌절해 있었다.


C. S. 루이스는 그런 나에게

작은 가능성의 문을 열어주었다.

주어진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면 글은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한 줄기 빛 같은 희망이었다.



너 그거 좋아하잖아


더 많은 우연이 겹쳤다. 손목 수술을 앞두고 옛 선생님을 만나러 갔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생님이 뜬금없이 물으셨다.


“요즘도 글 쓰고 있니?”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글쓰기야말로 손을 다친 내가 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토로했지만 선생님은 내 말을 못 들은 척 계속 말씀을 이어가셨다.


“한두 줄이라도 계속 써봐. 일기도 쓰고 책 읽으면 리뷰도 쓰고 영화 보면 소감도 쓰고.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계속 써봐. 너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너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그 한마디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왜 나를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억하고 계셨을까.


문득 옛 기억이 떠올랐다. 선생님께서 알고 계시던 시절의 나는, 정확히 말하면 초등학생이었을 때의 나는 글 쓰는 걸 무척 좋아했다.


친구들과 놀러 다닐 시간에 방에 틀어박혀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렸다. 상상의 나라를 펼치는 행복에 심취한 나머지 1년 정도에 걸쳐 소설 하나를 완성한 적도 있었다.


물론 딱 초등학생이 쓸 수 있는 수준의 필력과 내용이었다. 제대로 된 출판은 할 방법이 없어 자비 출판으로 몇 권만 남기고 끝났던 일이었다.


https://ebook-product.kyobobook.co.kr/dig/epd/ebook/480120003009P

(다시 말하지만 딱 초등학생 수준의 글이다. 심지어 편집도 엉망이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실 독자분은 없으시길 바란다.)



나는 별난 만큼 눈치도 빠른 학생이었다. 창작은 돈이 드는 일이지 버는 일은 아니라는 사실과, 본인은 작가가 될 만큼의 필력을 타고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 뒤로 일기 쓰기는 놓은 적이 없지만

제대로 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꽤 오랜 시간 동안 내가 글쓰기를 좋아한다는 생각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너 그거 좋아하잖아” 하는 말이 왜 잠잠하던 마음을 울렁이게 만들었을까.


만약 그 말이 “너 글 잘 쓰잖아” 같은 말이었다면

“아니요, 사람 잘못 보셨네요” 하고 말았을 일이다.


참고로, 연구결과에 따르면 실제로

지능(“넌 공부를 잘해”)에 대한 칭찬을 받은 아동은 실패 후 동기와 성과가 떨어지고,

노력(“넌 공부를 열심히 해”)에 대한 칭찬을 받은 아동은 실패 후에도 동기와 성과가 유지된다고 한다.



너 글 쓰는 거 좋아하잖아. 너 그거 열심히 했잖아.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그 말을 계속 곱씹었다.


난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나. 잊고 있었는데, 잊으려고 했는데, 난 정말 그걸 좋아하던 사람이었나.


지나간 일이라고 내쳐버리고 싶었지만

땀을 뻘뻘 흘리며 방학 내내 노트북을 두드리던 초등학생은

부정할 수 없이 행복했었다.



너 그거 할 수 있잖아


또 얼마 뒤, 엄마를 보러 집에 갔을 때였다. 식탁에 마주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엄마가 뜬금없이 물었다.


“너 요즘 일기는 쓰니?”


나의 숨길 수 없는 우울감을 엄마가 읽어낸 거였다.


“일기요? 뭐, 가끔 한두 줄씩. 나 손목 때문에 글씨 못 쓰는 거 알잖아”


세상이 나를 놀리려 작정을 한 건가. 엄마까지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너 정말 일기 계속 써야 돼. 한두 줄로는 부족해. 네가 고민하는 것들 다 써버리고 나면 종이 한 장일 뿐이야. 눈에 들어온다고. 그다음엔 무서울 게 없어져. 정신과 상담받는다고 생각하고 계속 써야 한다니까. 엄마도 매일 그렇게 해.”


그쯤 되니까 슬슬 어이가 없기 시작했다. 아니, 나 손목 다친 거 안 보이냐고요. 왜 이렇게 다들 글 쓰라고 난리야.


그런데 그 뒤에 엄마가 툭 던진 한마디가 생각할수록 신박했다.


“손으로 못 쓰겠으면 녹음이라도 해.”


녹음이라니. 글을 어떻게 녹음하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그건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하기엔 너무도 가능한 일이었다.



너 그거 좋아하잖아. 할 수 있잖아.


작은 희망과 작은 가능성, 두 가지가 섞이며 만들어내는 시너지는 엄청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안에 휘몰아치는 본능을 느꼈다.

머릿속에 쌓여 있던 것들, 가슴속에 억누르던 것들은 분명 소설 한 권짜리였다. 나는 이 일을 시작해야 했다.



뭐가 되든 간에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작은 알 속에 스스로를 감추고 숨어 있던 나를

세상이 거칠게 등 떠미는 것 같았다.


더 이상 그렇게 살지 말라고,

이제 둥지 밖으로 뛰어내리라고,

창공을 가르는 날갯짓이 얼마나 짜릿한지 느껴보라고.




Reference

Mueller, C M, and C S Dweck. “Praise for intelligence can undermine children's motivation and performance.” Journal of personality and social psychology vol. 75,1 (1998): 33-52.

Kamins, M. L., & Dweck, C. S. (1999). Person versus process praise and criticism: Implications for contingent self-worth and coping. Developmental Psychology, 35(3), 835–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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