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긍정하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가슴속에 터져 나올 듯한 이야기가 있었다.
오래도록 눌러 온 것을 이젠 터트리고 싶다는 욕망과
그렇게 할 방법이 있을 거라는 소망이 서로를 부추겼다.
손목은 글을 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손이 없으면 목소리로 글을 써보기로 결심했다.
녹음기를 틀었다. 빈 집에서 혼자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뱉는데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이야기의 큰 틀만 잡힌 상태였다.
내가 담고 싶었던 것들,
몸에 대한 처절한 부정과 사랑,
그리고 아프면서 보았던 파란 하늘과 초록빛 이파리.
나는 내 안에 있는 것을 하루 종일 쏟아냈다.
단어를 중구난방 쏟아낸 후에는 제목을 붙여 분류했다.
그렇게 내 드라이브에 작은 서랍이 하나씩 생겨났다.
나는 무언가에 몰두하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편이다.
(어릴 땐 생각에 잠긴 나머지 차가 달리는 길을 그냥 건널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런 나에게 음성인식 글쓰기는 의외로 잘 맞았다.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하니 머릿속에 하루 종일 그 생각밖에 없었다.
산책을 하면서도 중간중간 녹음했고, 지하철에서도 수시로 녹음기를 켰다.
(지하철에서 녹음하면 안내 방송이 함께 녹음되곤 했다.
너는 호수 앞에 웅크리고 앉은 나를 내려다보며 무언가를 건넨다.
“이번 역은 종로, 종로역입니다. “
나는 그것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그쯤 되니 웃음이 다 났다.)
그렇게 나의 이야기 서랍에는 소중한 것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소중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소중한 것이었다.
내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감정과
답할 수 없던 질문들이
단어가 되고 문장이 되려니 갑자기 소중했다.
낯설었다. 하지만 벙쪄 있을 여유도 없었다.
잊으려고, 넘어서려고, 이제 그만 놓아주려고 했던 것들을 그제야 신나게 쫓아다녔다.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네 번째 손목 수술을 기다리던 한 달 동안,
나는 되려 미치도록 신나 있었다.
살 길을 찾는 거야
오랜 고민 끝에 정착한 음성인식 방법을 미리 말씀드리자면,
iOS 기기의 기본 음성인식 기능은 한글 글쓰기에 적합하지 않다.
(영어는 참 잘 쓰는 것 같다.)
길게 녹음할 때는 클로바 노트를 썼고,
짧은 문장은 유료 받아쓰기 앱을 활용했다.
문장 부호 수정은 ChatGPT의 도움을 받았고,
반복되는 오타 수정은 한글 파일에서 찾기 및 바꾸기 기능을 사용했다.
(음성인식 기능은 ‘설이’라는 이름을 죽어도 못 알아듣는다.
‘설이’라고 말하면 ‘서리’라고 받아쓰고,
또박또박 발음하면 심지어 ‘Sally’라고 쓴다.
그 이름을 포기할 수 없어 결국 다 찾아서 고쳤다.)
정밀한 조정은 결국 손을 쓰는 수밖에 없다.
다만 iOS 기기보다는 안드로이드 기기가 국어를 훨씬 잘 알아듣고 띄어쓰기도 잘한다.
단어 하나하나를 바꾸는 데는 안드로이드 기기 음성인식을 활용했고,
퇴고하며 글을 갈아엎는 과정에서는 결국 친정엄마의 손을 빌렸다.
(3일 동안 친정집에 머물며 내가 말로 하면 엄마가 손으로 타이핑해 주었다. 3일 내내 떠들다가 목이 나가는 줄 알았다. 그래도 나보다 엄마가 고생이 많았다.)
처음에는 음성인식으로 글을 쓰고 있는 내가 조금 가엾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걸 손으로 다 썼다면, 관절이 아무리 튼튼해도 결국 손목이 아팠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연 전업 작가들 손목은 괜찮은 걸까 하는 막연한 의문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게 된 건 손목 질환이 작가의 고질병이라는 사실이었다.
약해도 튼튼해도 육신은 결국 육신이다.
주어진 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는 게 생명력이다.
더 이상 내가 불쌍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만에 감사라는 것을 느꼈다.
10년 전만 해도 이렇게 음성인식으로 글을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주어진 것들이 너무 감사했다.
나는 그때,
살아있음을 느꼈다.
참고로 한강의 『채식주의자』라는 책 작가의 말에서 읽은 이야기가 있다.
한강 작가는 그 책을 쓰며 손가락 관절에 무리가 와 컴퓨터 대신 손글씨로 글을 썼고, 타이핑 아르바이트를 해주시는 분이 그것을 모두 타이핑해 주셨다고 한다.
그마저 힘들어졌을 때는 음성인식과 전기자극 키보드 주문 제작까지 고민했고, 볼펜 거꾸로 잡고 자판 두드리기까지 해보셨다고 한다. (어, 나도 그거 해봤는데.)
작가의 말에서 그렇게 큰 위로를 받은 적이 없었다.
또 루게릭병을 조사하면서,
눈을 움직이는 근육만 남은 환자들이
안구 마우스로 쓴 책을 찾아 읽었다.
이것은 또 하나의 큰 이야기이기에
나중에 따로 글로 쓸 예정이다.
목소리로 글을 쓰던 나는,
그들이 눈으로 살아낸 이야기를
끝내 사랑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