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드넓은 들판이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나는 빼곡히 핀 꽃들 사이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딘다. 대지에 깔린 매혹적인 향기에 숨이 막힐 것 같다. 바람에 스치는 풀잎 사이로 벌들이 윙윙거리고 하얀 나비가 꽃잎 사이를 바삐 날아다닌다.
너를 따라잡으려 애써 보지만, 너는 이미 멀찍이 앞서 있다. 흩날리는 꽃가루에 목이 탄다. 물 한 모금으로는 채워질 것 같지 않은 갈증이다.
같이 가.
내가 불러도 너는 듣지 못한다. 재미난 것에 흠뻑 빠진 사람처럼 활기차다. 긴 겨울 끝에 돌려받은 봄날을 너는 기다렸다는 듯이 만끽하고 있다. 머지않아 또다시 빼앗길 풍경이 너는 괴롭지 않은가 보다. 아니, 도리어 즐기는 것도 같다. 광활한 풍경을 모두 품으려는 듯 가슴을 활짝 펼치고 있다. 너는 이곳에서 외로울 새가 없겠구나.
너는 두 눈에 담은 모든 것에서 기쁨을 얻고, 지나간 것엔 연연하지 않는 듯하다. 그 초연함이 문득 두렵다. 사랑할 것이 많은 네가 곧 나에게서 흥미를 잃을까 봐 겁이 난다. 나는 언제부터 네 시선을 갈구하기 시작했던가.
내 손이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나는 손에 닿는 대로 꽃줄기를 잔뜩 꺾어댄다. 두 손 가득 꽃대를 쥐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린다. 너는 멀찍이서 그런 나를 바라본다. 긴 줄기를 하나둘 엮으며 조바심을 달랜다. 풀잎의 촉감으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쓴다. 서투른 손끝에서 엉성한 화관이 만들어진다. 가만히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던 너를 향해 걸어가 화관을 건넨다. 내 손끝에는 풀 냄새가 배어 있다.
너는 둥근 화관을 잔잔히 바라본다. 너의 짧은 감상만으로도 나는 평온함을 느낀다. 네가 이따금 나를 살필 때면 나는 안도감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순간일 뿐이다.
이곳 아름답지 않아?
네 목소리는 가벼우나 흔들림이 없다.
나는 괜히 눈살을 찌푸린다.
나무가 봄이 오리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꽃은 겨울이 온다는 사실을 알 테잖아.
맞아, 봄은 가장 슬픈 계절이야.
슬픈 계절이라니, 그럼 뭐가 아름답다는 거야?
슬퍼서 아름다운 거야.
너는 작은 미소를 짓는다.
꽃은 가장 화려할 때조차 시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어. 자신의 존재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네 손이 화관을 쓰다듬는다. 꽃잎이 바스러질까 조심스러운 손길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건 찰나의 순간뿐이라는 걸 아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빛깔을 띠겠어.
들판을 뒤덮은 자줏빛은 영원보다도 선명히 존재하려는 찬란한 아우성 같다.
너는 여린 꽃들을 가만히 바라만 보면서도 사랑하는데, 나는 그것을 꺾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기운이 없어?
너는 조용히 묻는다.
예뻐, 네가 만든 화관.
너는 그것을 머리에 얹지도 않고 조심스럽게 들고 있다.
나도 너에게 주고 싶은 게 있어. 따라와.
너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따뜻한 봄바람에 흔들리는 꽃들은 보랏빛 물결처럼 일렁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