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설이는 눈을 비비며 잠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보았던 선명한 색채가 각막에 물들어버린 것처럼 눈앞에 아른거렸다. 거실 소파에 앉은 채 잠이 들었나 보다. 구부정하게 굽어 있던 어깨가 뻐근했다.
집 안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가만히 소파에 앉아 시계가 째깍이는 소리를 들었다. 머지않아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설아, 엄마 왔다.”
엄마는 큰 상자 하나를 들고 들어왔다.
“좋은 소식이 있어. 드디어 학원 인수받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다행이야.”
엄마가 들고 있던 상자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엄마는 설이의 얼굴을 마주 보며 호탕하게 웃어 보였다. 상자는 피아노 학원에서 챙겨 온 짐일 터였다. 엄마가 평생 일군 학원을 정리한 것은 딸을 간병하기 위함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불어나게 될지 모를 병원비를 아빠 혼자 감당할 수 있을까. 하지만 머지않아 설이에겐 가벼운 일상생활조차도 버거워질 것이었다. 엄마가 학원을 그만두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하여간 요즘 애들은 워낙 말을 안 들어서. 이제 애들 때문에 속 썩을 일 없겠네.”
설이는 속이 후련하다는 엄마의 말을 믿지 않았다.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엄마가 바닥에 내려놓은 상자 뚜껑을 열어 보았다. 먼지 낀 노란 필통, 아이들 이름이 빼곡히 적힌 낡은 공책, 두꺼운 노트북. 수년간 학원 책상 위에 자리했던 물건들이 종이 상자에 담겨 거실 바닥에 놓여 있었다.
설이는 피아노 학원에서 처음으로 건반을 만졌던 순간을 떠올렸다. 건반을 누르자 청량하게 쏟아지던 소리의 느낌을 기억했다. 엄마의 모든 것이자 자신의 시작이었던 그곳이 사라졌다.
자신의 전부였던 음악을 차라리 깨끗이 도려내기로 결심한 게 몇 달 전이었다. 집에 있는 피아노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지 오래였다. 모국어보다 악보를 더 빨리 읽었던 두 눈은 갈 곳을 잃었고, 음악으로 가득 채웠던 귀는 비어 있었다. 분주히 자극할수록 온순했던 온몸의 감각이 이젠 날이 갈수록 아우성을 치는 듯했다.
공허함이란 참으로 소란하구나.
마음속에 너무 크게 자리 잡고 있던 것을 도려내고 나니, 그곳은 비다 못해 진공과도 같은 상태가 되었다. 밀려드는 외부의 공격을 일정한 압력으로 밀어낼 줄 알았던 마음은 오히려 모든 것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상념으로 종일 머릿속이 소란스러웠다.
다른 것을 전공했다면 조금은 덜 괴로웠을까. 일찌감치 음악을 포기하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거나, 과학이나 언어 같은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이 몸으로도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을까. 음악이 아니라 글이나 숫자를 공부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생각도 입으로 뱉어야 말이 되고, 지식도 손으로 써야 글이 되는 물질의 세상에서 몸을 움직일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루 종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