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19

소설 연재

by 바달


나무가 홀로 서서도 고독을 모르는 이유는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가지를 뻗고 잎을 돋우며 자신의 세상을 넓혀가고 있으니까.


설이는 두 번째 손가락에 정신을 모았다. 컴퓨터 마우스 버튼이 잘 눌리지 않았다.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 쓰다 보니 마우스 버튼이 뻑뻑해진 거라고 믿고 싶었다. 왼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오른손 검지 위에 얹었다. 왼손 무게까지 실어 버튼을 눌러보려 했지만 양팔을 동시에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번엔 노트북 터치패드 위에 오른손을 얹어 화면 속 커서를 움직여 보았다. 손가락으로 터치패드를 섬세하게 조작하기가 쉽지 않았다. 설이는 오른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고 왼손 엄지손가락으로 터치패드를 두드려 클릭했다.

컴퓨터 화면에는 유학 간 친구가 보내준 영상 파일이 아직 남아 있었다. 왜 아직도 지우지 못했을까. 이메일을 받은 게 벌써 재작년쯤이었나. 매일 똑같은 하루가 반복되다 보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에 대한 감각이 흐려졌다.

보스턴의 한 대학에 합격했다는 소식 이후로 한두 번 정도 더 연락이 왔었다. 그 연락에 답하지는 않았다. 친구에게 근황을 알리고 싶지 않았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자연히 멀어지겠거니 생각했다.

파일을 지워버리려던 손이 머뭇거렸다. 잘 지내고 있을까. 새로운 환경이 낯설지는 않았을까. 워낙 활달한 성격이니 어디에서든 잘 적응했을 것 같았다. 영상을 지우기 전에 한 번만 열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을 틀었다. 영상 속의 두 손은 건반 위에서 자유로이 움직이고 있었다. 섬세하면서도 힘 있게 터져 나오는 선율을 들었다. 고등학교 때보다 더 깊고 선명해진 소리였다.

아직도 피아노 앞에 앉으면 눈을 감고도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날마다 몇 시간씩 들여다보던 악보가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리는데. 매일 벽돌 한 장을 얹는 심정으로 정성스럽게 쌓아 올린 성벽이 의사의 한마디에 이토록 허망하게 무너져 내릴 줄 알았던가. 손끝으로 마주했던 거대한 세상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컴퓨터 마우스도 누르기 어려운 앙상한 손만 남아 있었다.

영상 속 친구의 손은 끊임없이 선율을 쏟아냈다. 저 손가락과 손목, 팔꿈치와 어깨는 어째서 저 행위를 견뎌주는 걸까. 갑자기 떨리기 시작한 팔 근육 때문에 더 이상 영상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설이는 보행기를 잡고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얼마 전 엄마가 분갈이를 했던 거실 베란다의 동백나무는 새로운 흙에 적응하기가 힘든지 자꾸만 잎을 떨구고 있었다. 설이는 거실 소파에 털썩 앉아 작은 화분 속에서 소리 없이 몸살을 앓고 있는 동백나무를 바라보았다. 한 뼘만치 흙을 차지하고 있던 나무는 잎을 잃을수록 더 외로워 보였다.

홀로 심겨 있다 해서 메말라가는 나무는 없다. 토양과 수분, 햇빛과 바람만 있으면 충분하다. 나무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확장하고 자신의 세상을 창조하느라 외로울 틈이 없다. 그것이 온전히 홀로 살아남아야 하는 나무가 터득한 생존법이다.

나무는 자라야 한다. 그것이 나무의 숙명이다. 가지가 잘리면 또다시 다른 가지를 내며, 계속해서 자신을 확장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장을 포기한 나무는 살아남을 수 없다. 외부로 뻗어가던 에너지를 속으로 움켜쥐는 순간, 홀로 서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그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메말라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신의 손으로 만들어졌을까. 가지 끝에 잎을 내며 자신이 돋운 녹색 잎을 스스로 위로 삼는 나무처럼, 신도 외로워서 우주를 만들었을까.

무한대의 신은 무한대의 고독을 느꼈을까. 외로운 신이 만들어낸 우주라서 이토록 외로운 세상이 된 걸까.

동백나무는 잠깐의 몸살 끝에 새로운 가지를 뻗어갈 것이다. 거름으로 돋우어진 흙에서 이전보다 더 짙은 녹색으로 물들고, 겨울이 찾아오면 그땐 분홍빛 꽃잎을 피워낼 것이다.

그러나 그 앞에 앉은 자신은 끝내 자라지 않는 나무와도 같았다. 자라나기를 멈춘 나무는 서서히 시들어가리라는 사실을 설이는 알고 있었다.


그날 저녁 거실 베란다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신에게도 손이 있다면 그 손을 부러뜨리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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