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26

소설 연재

by 바달


산비탈이 가파르다. 이렇게까지 경사가 심했었나. 겁도 없이 올랐던 산길이다. 오른 만큼을 이젠 다시 내려가야 한다.

같은 땅이다. 단지 오를 땐 손을 뻗으면 닿을 듯이 가깝던 땅이 눈앞에서 조금 멀어진 것뿐.

더 이상 바스락거리는 가을의 소리에 귀 기울일 여유가 없다. 발밑의 낙엽에 미끄러져 중심을 잃게 될까 봐 겁이 난다. 매끄러운 흙을 피해 자갈 박힌 거친 지면을 골라 밟는다.

오르던 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무사히 내려가는 것 역시 쉽지 않다는 사실을. 산을 오르면, 그만큼을 도로 내려가야 한다는 사실을.

단단히 박힌 줄 알았던 자갈이 발밑에서 미끄러지면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가파른 내리막 아래로 쏟아지는 것은 상상만으로도 등줄기가 선뜩하다.

어딘가로 굴러 떨어진 적이 있었던가. 기억이 두려움을 만드는 건지, 아니면 두려움이 기억을 만드는 건지 가물가물하다.

다리에 힘이 풀린다. 중력에 못 이겨 어그러지는 뼈마디가 시큰거린다. 발을 내디디기가 겁난다.


나 못 내려가겠어.


몇 걸음을 앞서가던 너는 나를 뒤돌아본다. 나는 가만히 서서 너의 눈을 마주 본다. 너는 이내 성큼성큼 걸어 올라와 나의 등 뒤에 선다.


자, 뒤돌아서 나를 보고 서.


나는 떨리는 두 다리로 조심스럽게 뒤돌아선다. 네가 곧바로 나의 두 손을 잡아 올려 단단히 움켜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안쓰러운 눈치다.


뒤로 한 걸음씩 걷는 거야.


네가 내 손을 잡아준 건 처음인 것 같은데, 양손을 붙잡힌 이 자세가 왠지 모르게 익숙하다.


네가 발을 딛는 곳은 내가 봐줄 거야. 날 믿어. 뒤로 걸으면 내리막도 내려갈 수 있어.


오른발을 뒤로 뻗어 본다. 보이지 않는 곳에 발을 딛는 기분이 낯설다. 뒤로 내디디는 발뒤꿈치에 온 신경을 집중한다.

생경한 느낌이기는 하나 두려움은 아니다.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체중을 너에게 의지한다. 희고 말쑥하니 단풍잎 같던 손이 의외로 굳건하다.

가을바람에 낙엽이 흩날린다. 무게도 부피도 없이 유연하게 산을 오르내리는 바람은 느린 나의 걸음걸이를 희롱한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전혀 샘이 나지 않는다. 홀연히 모든 것을 스치고 지나가야 하는 바람이 부럽지 않다.

뒷걸음질에 적응할수록 손바닥에 맞닿은 살결의 감촉이 더 선명해진다. 내가 발을 헛디디더라도 너는 날 붙잡아줄 것이다. 너의 손을 붙잡은 나의 느리고 무거운 몸이 싫지 않다.

너는 산의 끝자락에 다다를 때까지 내 손을 놓지 않을 생각인가 보다.

너의 체온을 느낄 수 있는 나의 피부가 좋다. 너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붙잡을 수 있는 나의 뼈마디가 좋다.

바람도 비껴가야만 하는 나의 부피가 좋다. 흔들림 없는 너의 팔에 의지한 나의 질량이 좋다.

낙엽이 잘게 바스러지고 있다. 찰나의 순간뿐이라 해도 좋으니 너의 세상에서 나는 작은 부피와 질량을 차지하며 존재하고 싶다.



월, 수,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