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27

소설 연재

by 바달


희다. 눈보라도, 안개도, 얼어붙은 물과 흐릿하게 번진 태양광도 희다.

나루터 위엔 서늘하게 포근한 눈이 소리 없이 쌓여간다.


거기는 호수야


나지막한 목소리가 먼 추억처럼 안갯속을 떠돈다.


호수 위로 떠 있는 두 발,


뒤로 기대어 선 두 손,


기다란 허벅지,


검은 셔츠,


가녀린 목덜미,


하얀 속살.


황홀하도록 창백한 속살.


나는 서서히 손을 뻗어 너의 검은 셔츠 하단의 끝 단추, 작고 검은 단추 하나를 붙잡고 엄지를 문지른다. 너의 싱그러운 체취에 얼굴을 파묻고 싶다. 문지르던 작은 단추가 단춧구멍을 빠져나간다. 너는 나에게 너를 내어줄까.


단추 하나,

나는 헝클어진 너의 검은 머리를 상상한다. 한 올 한 올 새까만 머릿결. 선명한 어둠을 손으로 쓸어보고 싶다.


단추 둘,

창백한 피부, 겨울 아침처럼 고요한 살결. 너의 싱그러운 품에서 칠흑 같은 소멸을 벗어나 영원한 포근함을 들이쉬고 싶다.


단추 셋,

어지러운 열기, 달아오른 손 끝. 아랫배에서 간질거리는 공허함이 정신을 흩트려 놓는다.


세 번째 단추에서 엄지가 머뭇거린다.


아름다운 네 앞에 내가 앉아 있다.

진정되지 않는 간지러움. 다시 너에게 집중하고 싶은데.


너에게도 빈자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이 진동을 너에게 전할 수 있을 텐데. 살포시 맞댄 피부를 통해 너는 이 간질거림을 느껴줄 텐데. 허리춤을 붙잡고 끌어안으면 이 전율이 애초에 나의 것이었는지 너의 것이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될 텐데. 곧이어 너를 터질 듯이 끌어당기고, 너와 나의 뼈가 맞부딪히는 순간에, 나는 비로소 너와 하나가 될 텐데.

열린 옷자락 안으로 손을 넣어 너의 살결을 더듬는다. 미세한 떨림을 찾아 방황한다. 나를 밀어 넣고 싶다. 너에게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큰 존재이고 싶다. 나의 커다람으로 인해 너의 호흡이 가빠질 때 비로소 그 안에서 쉴 수 있을 것 같다.

너를 파헤쳐 놓고 싶다. 헤치고 싶다. 너를 짓이기고 터뜨려 집어삼켜서라도, 나는 너를 가지고 싶다.


아니, 나는 너이고 싶다.


두 줄로 뻗은 아랫배의 근육 사이로 길게 패인 자리를 지그시 눌러본다. 너는 초연한 자연, 격렬한 젊음, 거대한 영원, 찬란한 아름다움. 너에게는 빈자리가 없다. 너는 내가 아닌 모든 것. 나는 네가 아니다. 분노와도 같은 거센 감정이 나를 집어삼킨다.


손가락을 눌러 넣는다. 파고든다. 손톱으로 팽팽한 뱃가죽을 터트리고, 축축하고 물컹한 네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눅진하게 젖어드는 손가락. 짐승적인 감촉이 억눌러왔던 나를 해방시킨다. 뜨거운 체온 속으로 깊숙이, 더 깊숙이 파고들 테다. 덥고 미끌거리는 것을 넘어 울룩불룩하고 단단한 것이 손끝에 닿는다. 너를 헤쳐서라도 너를 가지고 싶다.


요추 하나를 움켜쥔다. 나는 손에 쥔 것을 놓는 법을 알지 못한다. 여전히 나는 흐르듯이 존재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나는 결코 너일 수 없다.


나의 손아귀는 둔탁한 파열음을 느낀다. 뜨거운 척수액. 터져 나오는 액체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참혹한 검정. 피로 물든 검은 셔츠.


선홍빛으로 흥건해진 나루터.


분홍으로 젖어드는 눈.


적빛으로 물드는 호수.


짙은 붉은색.


뜨겁고 찐득하고 짙은 붉은색.


나를 이렇게 만든 건 두려움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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