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연재
들꽃 향기를 머금은 바람은 뜻밖일 정도로 포근하다. 빽빽한 가지 사이로 파고드는 따스한 바람에 연한 빛깔의 잎사귀들이 살랑거린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작은 새들이 호수 너머로 펼쳐진 푸른 허공을 향해 날아오른다. 새들의 지저귐은 공기 중에 가득한 온기와 맞부딪혀 금세 희미해진다.
햇볕에 데워진 나루터에서 은은한 나무 향이 피어오른다. 나는 따뜻한 기운이 물든 나무 바닥의 표면을 살포시 문지른다. 얼룩진 데 없이 깨끗하다.
물가에 무리 지어 자란 푸른 갈대가 잔잔한 물결에 맞춰 흔들거린다.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본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맑은 햇빛이 호수 위로 쏟아져 내린다. 수면은 물결마다 은빛으로 반짝인다.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너는 보이지 않는다.
이 넓은 호숫가에 홀로 서 있다. 가슴이 짓눌리는 것만 같다.
터질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는다. 크게 소리치면 저 거대한 바위산에 부딪혀 돌아온 메아리가 나를 집어삼킬지도 몰라. 나는 차마 입을 열지 못한다.
싱그러운 풀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하다. 나는 끊어질 듯이 가느다란 호흡을 붙잡는다. 하얀 새들이 호수 위로 날아든다.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잎사귀 하나가 살랑거리며 떠내려간다.
두렵도록 아름다운 이 공간을 벗어나야 한다.
나는 도망치듯 뒤를 돌아 커다란 나무를 향해 걸어간다. 촉촉하게 젖은 흙이 발아래에 부드럽게 밟힌다. 향긋한 흙냄새가 코끝을 간지럽힌다. 따뜻한 바람은 걸음의 속도로 피부를 스쳐 간다.
그림자 밑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조금 선선하다. 잎사귀 사이로 새어드는 햇빛이 잔디 위로 흩뿌려져 반짝인다.
저 작은 새처럼 푸른 잎사귀 뒤로 몸을 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길게 뻗은 가지를 천막 삼아 흙바닥에 주저앉는다. 두꺼운 나무줄기에 등을 기대자 거친 감촉이 등 뒤에서 따끔거린다. 무릎을 끌어안고 몸을 작게 웅크린다. 너는 보이질 않는다.
나는 왼손을 뻗어 흙 한 줌을 손에 쥐고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촉촉한 토양의 감촉을 느낀다. 허리를 숙인 채 이곳에 앉아 영겁의 세월을 기다리다 보면 언젠가는 나도 이 대지에 녹아들 수 있지 않을까. 그 속에서 쉬는 숨은 흙냄새처럼 포근하지 않을까.
나는 부드러운 토양 아래로 왼손을 파묻었다 꺼내기를 반복한다.
흙 속이 조금만 더 따뜻했으면 좋았을 텐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새들의 지저귐이 잦아들고 하늘은 고요에 잠긴다. 나는 힘없이 길게 늘어진 나무의 그림자를 바라본다. 흙 속은 더 차갑다.
몸을 누일 곳을 찾아야 한다. 주위를 둘러보다가 너의 작은 오두막이 눈에 들어온다.
저녁노을로 붉게 물든 호수, 그리고 그 끝자락에 홀로 서 있는 낡은 오두막.
너의 오두막 안을 몰래 들여다보면 너는 화난 얼굴로 나에게 성을 낼까.
하지만 이 흙 속은, 밤을 기다리는 흙 속은 너무 차가운걸.
나는 왼손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오두막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게 느껴진다. 붉게 물든 호수에 몸을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말없이 광활한 호수에 파문을 일으키며 고요히 가라앉고 싶다.
나는 나를 끄집어 올리던 너의 손을 그리워하고 있는 걸까.
나무로 된 작은 문에 힘을 실어본다. 잠겨있지 않다.
나는 잠시 망설인다. 나는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문을 밀어 연다. 어두운 오두막 안으로 은은한 노을빛이 퍼져 들어간다. 익숙한 냄새가 난다.
너의 체취.
싱그럽던 너의 냄새.
나는 오두막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인다.
좁은 오두막 안에 작은 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둥근 탁자 중앙에 세워져 있는 작은 물체가 어렴풋이 눈에 들어온다. 희미하게 드러난 윤곽이 낯설지가 않다. 나는 천천히 탁자를 향해 걸어간다. 발밑의 나무판자가 걸음을 뗄 때마다 삐걱거린다.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물체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린다.
따뜻하다.
네가 만든 작은 나무 오리.
푸른 호수 위에서 마치 살아있는 듯이 흔들거리던 나무 오리.
익숙한 온기다. 네가 오래도록 손에 쥐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나무 오리를 조심스럽게 탁자에 내려놓는다.
결연히 걸음을 떼어 오두막을 나선다.
나는 너를 찾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