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1

소설 연재

by 바달


강물이 바다를 넘치게 한 적이 있던가.

쏟아지는 과제곡, 끝없는 연습.

“다 외워 왔니? 한번 들어보자.”

악보라는 표지판 없이 손이 기억하는 길을 홀로 더듬어가야 할 시간이 왔다. 설이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라벨(Ravel)의 ‘물의 유희(Jeux d’eau)’. 공기의 긴장 위에 첫 음을 던지는 순간, 연주는 설이가 아닌 설이의 몸의 것이 되어 흐르기 시작했다.

푸른 수면 손을 뻗어 본다. 손끝에 잔잔한 물결이 닿는다. 파동을 일으키며 입수한다. 몸을 감싸는 차가운 진동. 이내 고요한 물속이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작곡가들은 음악에 색채감과 순간적인 감정을 담아내기 위해 노력했어요.

무언가를 찾고 있다. 반짝이는 것들, 몽환적인 무중력. 손가락 사이로 흐르는 물결, 아래로는 끝없는 어둠.

… 인상주의 음악은 전통적인 화성을 탈피하고, 모호한 분위기와 강렬한 색채감을 만들어냈어요.

날카로운 차가움, 묵직한 시간. 흔들리는 그림자와 출렁이는 빛줄기. 푸른빛과 초록빛이 뒤섞인 깊은 물속.

… 조성 중심의 구조에서 벗어나, 찰나의 상태와 빛, 색감을 담아내려 했던 거죠.

물속에선 숨을 쉴 수 없다. 호흡이 가쁘다. 손에 쥐려던 것을 놓친다. 수면 위로 떠오른다. 밤하늘. 호수엔 어느덧 별이 흐른다.

산란한 정신을 의연하게 끌고 가는 것은 연습으로 단련된 몸이었다. 오백 번도 넘게 가봤던 길. 손은 결국 연주를 완성했다.

무엇이었을까, 그 반짝이던 것들은.

“그래, 다 외웠네. 하여간 성실해. 자, 다시 시작해 보자.”

세부 레슨이 시작되었다. 여기는 더 작게, 여기는 레가토로 부드럽게.

그동안 애써 익힌 화성법과 대위법을 라벨은 깨부쉈다. 새로운 소리. 인상주의 작품 속에서 설이의 마음은 수시로 길을 잃었다.

페달은 여기에서 떼고, 이 부분의 소리를 선명하게 해야지.

서양음악은 완성에 다다를 때마다 그 뻔함을 지겨워하며 스스로를 해체해 왔다. 소리는 한 올 한 올 모여 두꺼운 카펫 같은 다성음악이 되었고, 수많은 선율이 얽히다가 단성음악으로 회귀했다. 다시금 지성을 담을 논리적 구조가 필요하다며 소나타 형식을 입었고, 논리가 아닌 찰나를 담아내겠다며 인상주의로도 변이 했다.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제는 작곡가마다 자신만의 어법으로 현대음악을 만들어온 지 오래다. 늘 새로워야 하는 예술의 끝은 어디일까. 이 땅 위에 새로운 것이 남아있긴 할까.

긴 세월을 살아남은 악보들은 때론 견뎌야 하는 시험곡, 때론 빛나는 한 명을 발굴해 내기 위한 콩쿠르 지정곡이 되어 있었다. 들풀처럼 흩날리는 시간 속에서 이 수고로움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설이는 레슨을 마친 뒤에도 도서관으로 가서 학과 중간고사 공부를 했다. 날은 금세 어두워졌다. 도서관에서 내려오는 계단 위로 포근한 밤공기가 깔려있었다. 가느다란 봄 풀벌레 소리가 섞여 있었고, 새까만 하늘엔 가로등 불빛이 흐릿하게 번져 있었다.

이어폰으로 실기곡을 반복해서 들으며 지하철에 올라탔다. 쇳소리 섞인 진동, 금속 바퀴의 마찰음, 공기를 가르는 굉음, 오래된 스피커에서 나오는 안내방송, 뒤섞이는 발걸음 소리.

소리가 좋아서 시작했던 음악이었다. 그 대가로 지나치게 예민해진 귀를 얻었다. 카페마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스피커의 왜곡으로 깨져서 들렸고, 음정이 흔들리는 노랫소리와 미세한 불협화음까지도 거슬리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 출전했던 콩쿠르 무대를 떠올렸다. 여름 내내 반복된 연습 끝에, 설이는 조명이 쏟아지는 외로운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또박또박한 소나티네. 어린 마음에도 느꼈던 고전주의의 명징함. 언어로는 닿을 수 없는 저 너머의 세계를 향해 얼음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느낌이었다. 한 칸씩 손으로 더듬으며 올라가 마침내 사다리를 건넜을 때, 연주는 끝나 있었다. 음악은 그때의 설이에게 위험한 첫사랑과도 같은 것이었다.

설이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냉장고 문을 열었다. 엄마가 해 둔 된장찌개와 계란말이를 꺼내 전자레인지에 데웠다. 구수한 집밥의 온기가 부엌을 채우기 시작했다. 밥을 먹는 동안만큼은 마음이 고요했다. 마지막 한 숟가락까지 빠르게 긁어모아 입에 넣었다. 식사를 마치자, 하루치의 피로가 몰려왔다. 서둘러 설거지를 마친 뒤, 거실에 던져두었던 가방을 챙겨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얼른 샤워를 하고 잠들고 싶었다.

참 웃긴 일이었다. 가방의 무게처럼 버거웠던 하루를 견딘 보상은 따뜻한 밥과 포근한 잠, 순전히 동물적인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바람을 잡는 심정으로 뛰어다닌 끝에 얻은 것이, 아직 탯줄도 자르지 않은 뱃속의 태아조차 누리고 있는 것들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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