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2

소설 연재

by 바달

피타고라스는 수학이 우주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열쇠라고 믿었다. 그에게 아름다움이란 곧 완벽한 질서였다.

“어제 꿈을 꿨어.”

“무슨 꿈이었는데?”

무슨 꿈이었을까. 날카롭고 청명한 소리, 부드럽고 두꺼운 소리. 작고 경쾌한, 선명하게 고요한 소리.

“얼음 소리였던 것 같아.”

“얼음 소리? 음대생은 꿈에서도 소리를 듣나 봐?”

그는 쾌활하게 웃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가벼움이 싫지 않았다.

학과 중간고사의 마지막 과목 시험을 마치고 나오자마자 음대 건물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를 발견했다. 진한 파란색 티셔츠에 연한 색 청바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은 채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조금만 천천히 걷자.”

몸에 힘이 없어 그의 팔꿈치를 붙잡으며 말했다.

“조금 피곤해서 그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멈춰 선 그를 안심시켰다. 그는 설이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속도를 맞추어 걸었다.

오후의 햇살이 따뜻한 봄날이었다. 한강공원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젊은 부부와 마음껏 뛰어노는 어린아이들이 보였다. 운동복 차림의 사람들이 땀 흘리며 한강을 따라 뛰고 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싶은 풍경이었다.

공원에 놓인 벤치에 앉자마자 편의점에서 사 온 음료를 꺼내 들었다.

“이리 줘봐. 내가 열어줄게.”

그는 설이가 음료 뚜껑을 못 따는 것을 보고 말했다.

설이는 오른손을 주무르다가 문득 엄지두덩의 낯선 떨림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의아했으나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잔물결 이는 강물 너머로 고층 빌딩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층마다 빼곡히 앉아 있을 사람들을 생각했다. 숨 쉴 틈 없이 바쁜 도시였다. 아슬아슬한 빌딩들과 산들바람에 살랑이는 노란 들꽃. 그 사이로 계절은 회색빛으로 섞여 흐르고 있었다.

피아노 하나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도 되는 걸까.

위태롭게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앉아 설이의 허리에 살며시 손을 감았다.

“저녁은 배달 음식 시켜 먹을까?”

그는 쌍꺼풀이 진한 두 눈에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의 밤색 머리와 건강하게 그을린 피부는 붙임성 좋은 성격과 잘 어울렸다.

“그래, 노을 질 때까지 여기 있자.”

머릿속에 안개처럼 가득하던 생각을 떨쳐두고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고 싶다는 욕심 때문이었을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부터는, 마치 이전과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곤 했다.

지난 학기에 그와 같은 교양 수업을 들었다. 이상하리만큼 눈이 자주 마주친다고 느낄 즈음, 그가 다가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쥐여 주었다.

‘부담스럽지 않으면 연락 주세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조금 놀라긴 했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정성껏 눌러썼으나 어린아이 같은 글씨체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공기가 살짝 가벼워진 느낌이 들었다.

‘털털한 걸음걸이.’

첫 만남을 가졌던 카페에서 그는 설이의 털털한 걸음걸이가 좋았다고 말했다.

설이는 스스로를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람은 꾸밈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좋아해 주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호감이 진심이라면, 누군가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해 준다면, 매일 스스로에게 던지는 의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피아노 앞에 앉아 자신을 할퀴며 찾으려 했던 답보다 훨씬 쉬운 해답이 주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돗자리를 펴고 앉아 배달시킨 음식을 먹고 나니, 반포대교 너머로 해가 지기 시작했다. 해 질 녘의 공기는 조금 쌀쌀했다.

“이제 집에 가 봐야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그의 눈에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함께 보내는 날들이 쌓여가면서 그가 자신과 걷고, 영화를 보고, 카페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고 있음을 느끼게 됐다. 처음에는 애써 모른 척했으나, 서서히 그 시선이 불편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깨닫고 있었다. 그에게 쉼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가 자신에게 휴식이 되어줄 수 있을지를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늦었으니까 이제 들어가야지. 조금 춥다.”

설이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도 찰나의 서운함을 지우고 일어나 돗자리를 접었다.

지하철역으로 향하는 길에 설이의 오른발이 자갈에 툭툭 걸렸다.

피곤할 땐 항상 이랬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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