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것이남는것
맛있게 먹는 사람을 좋아한다. 많지도 적지도 않은 양의 음식을 야무지게 퍼서 입안으로 깔끔하게 쏙 넣는 사람을 보면 멋져 보인다. 자신의 먹는 모습은 자세히 관찰하기도 힘들고, 나는 대개 먹을 때 딴 생각을 많이 하기 때문에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가끔 누군가 내게 ‘너 참 맛있게 먹는다. 나까지 기분 좋아지네,’ 하는 이야기를 할 때는 오히려 내가 기분이 더 좋아진다. 그래서 과하지 않은 양의 음식을 맛깔나게 먹는 것이 내 식사시간의 목표다.
주기적으로 무기력함과 우울함이 느껴질 때는 내가 먹는 음식들부터 점검해본다. 점심에 기계처럼 쑤셔 넣는 구내식당의 식사는 메뉴가 다른데 맛이 다 비슷했다. 아침저녁은 커피와 한두 개의 과자로 대신한다. 저녁은 피곤하고 체중조절도 해야 하니 두유와 단백질 쉐이크 정도를 먹었다. 야채를 먹고 싶을 땐 오이와 토마토, 양배추를 잔뜩 먹는다. 아무런 드레싱도 없이. 나트륨을 극단적으로 제한하는 식단을 지속한 적도 있다. 무려 4년간. 누가 들으면 체육선수나 모델, 방송인이냐 할 법한 식단이었다. 실제로 유명 연예인의 식단이기도 했고. 유기농과 해독식단, 저탄고지 같은 유행하는 식단은 다 해봤었다.
신체의 결과는 반짝 좋았을지 모른다. 다만 정신적인 결과는 처참했다. 약한 거식증을 동반한 식이장애, 예민함, 우울함. 그리고 이런 증상이 당연하다 생각하는 일종의 합리화까지. 그 증상들을 고치기 위해서는 과감히 ‘제한’을 버리는 마음이 필요했다.
그리고 돌고 돌아 2020년의 내가 있다. 삶에 조금 힘을 빼고 살아가는 허술한 사람. 인생을 살아가는데 먹는 즐거움이 빠진다면 너무나 슬플 것이기에 나는 차라리 먹는 것을 즐기기로 했다. 건강하고 맛있는 음식을 만들고 먹는 것은 결국 내게도 행복이 되었다. 뭐든 너무 극단적인 선택은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큰 교훈도 배우게 되었다.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받은 날이면 매콤한 치킨을 먹고 싶다. 목을 깔끔하게 만들어주는 탄산을 더해주면 최고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면 맥주 캔을 딴다. 더도 덜도 말고 딱 한 캔. 위로가 필요한 날에는 크림이 들어가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다. 소고기와 감자, 양파를 메인으로 하고 당근과 브로콜리로 색을 더한 크림스튜를 은근한 불에 졸인다. 시간이 없을 때는 까르보나라를,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는 스프가루를 사다가 쇠고기 스프나 브로콜리스프를 한 냄비 가득 끓여 빵을 찍어먹는다. 이도저도 아니면 눈부터 즐거워지는 달콤한 디저트가 필요하다. 당근과 호두가 들어가 건강까지 생각한 당근 케이크, 꾸덕꾸덕 혀를 감싸는 브라우니, 꼬끄와 필링의 조화까지 일품인 마카롱 같은 것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한 날은 수색이 아름다운 차 한 잔으로 다독인다.
먹는 것에도 열정이 필요하다. 질적으로 좋은 음식도 중요하지만, 마음에 좋아야 하는 음식도 있다. 그런 음식을 찾아내는 열정, 만들어내는 열정은 별것 아닌 것 같아도 마음을 좀먹는 우울함을 희미하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