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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온뒤 Mar 04. 2021

나를 합격시켜 준 도서관

 회사에 입사를 하기 위해 공채 공부를 하던 당시, 내가 유일하게 정기적으로 갈 수 있던 곳은 도서관이었다. 어두운 곳에서는 한도 끝도 없이 자버리는 나는 독서실이 체질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학원을 끊으며 다니기에는 등 하원 시간이 아까웠기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도서관이었다. 


 집에서 버스로 여섯 정거장이 떨어진 그 도서관은 깎아지른 경사면을 굽이굽이 올라가야 겨우 도착할 수 있는 곳이어서 대부분의 날들을 출근하는 아버지의 차를 타고 가곤 했다. 도서관의 열람실이 문을 여는 아침 7시. 며칠 다니다 보면 익숙한 얼굴들이 편한 옷과 무거운 가방을 메고 도서관으로 한 명씩 두 명씩 도착한다. 도서관 문이 열리는 것은 7시에서 아주 조금 이른 시간이다. 공부하던 날은 겨울이었고 부산의 강바람은 매서워서 나는 늘 얼굴이 빨갛게 된 채로 입장하고는 했다. 늘 가던 열람실 앞에서 500ml짜리 텀블러에 따스한 물을 가득 넣었다. 가끔은 매실청을, 노란 믹스커피를, 집에서 싸 준 보리차를 넣어 오기도 했다. 당시에는 여성 열람실과 남성 열람실이 나누어져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내 주변 사람들이 모두 여성들이어서 그렇게 기억하는 것일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업을 위해 고시공부를 하거나 영어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었다. 여섯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대형 책상과 독서실 책상처럼 칸막이가 쳐진 책상이 있었는데, 트여 있는 것이 좋았던 나는 늘 기둥과 벽 사이에 있는 자리를 선택하곤 했다. 모두의 앞에는 두껍고 무거운 책들이 벽처럼 쌓여있었다. 민주국사, 스파르타 영어, 개론서와 국어책. 대부분 브랜드는 조금씩 달라도 비슷한 내용의 책들을 가지고 있었더랬다. 분위기는 조용했다. 늘 앉는 자리에는 대부분 같은 사람들이 같은 자리에 앉았다. 내 앞의 사람은 일반행정직을 준비하는 것인지 행정 관련 개론서가 가득했다. 옆 어귀에 가끔 나왔던 사람의 책상에는 임용고시에 관련된 책이 한가득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세 달 정도를 매일 보다 보니 눈에 익어버린 것이다. 


 다행히 방학기간이어서 바로 옆에 위치한 고등학교의 학생들은 출입이 적었다. 공부를 하다 숨이 막히거나 모르는 전공지식이 나오면 아래층으로 가서 책을 뒤져보기도 했다. 공부가 하기 싫은 날에는 소설 코너에서 무협지 한 권을 꺼내 들었다가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는 공부를 하고 있을 거라는 불안감에 책 냄새만 맡고 넣어버린 적도 있었다. 시험까지 채 100일이 남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한 공부는 늘 불안의 연속이었다. 최신 경향을 알아보기 위해 주변 사람들이 어떤 책을 보고 있는지 책 등을 훑기도 했다. 


 주변에 유흥가가 없었던 것은 천운이었다. 유혹에 약하지만 귀찮음을 이기지 못하는 나는 늘 어머니가 싸 주신 보온 도시락으로 점심과 저녁 끼니를 해결했다. 밥을 그득하게 담아 절반은 점심으로 절반은 저녁으로 먹었다. 도서관 구석에는 중앙계단이 아닌 구석진 계단이 따로 있었는데 그곳으로 통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15분 남짓한 점심시간을 가지면서 밥을 먹다가 창밖을 바라볼 때면 괜히 청승을 떨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시간을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이란 방법은 다 쓰는 것이 그때 나의 고집이었다. 


 구립도서관이어서 그런지 이용자는 생각보다 많은 편이었다. 지금처럼 도서관의 문화프로그램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 도서관은 점자도서관이라는 특화된 전공분야가 있었다. 아주 가끔 가장 아래층의 점자도서관을 찾는 사람들을 보곤 했다. 눈을 감고 벽면에 부착된 점자 안내문을 더듬을 때는 내 눈이 아직 제 기능을 하고 있음에 감사함을 여러 번 느꼈다. 방문하는 사람들이 불편해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점자도서관이 조금 더 접근하기 쉬운 곳에 위치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도 들었다. 


 그렇게 세 달. 겨울이 겨우 끝나고 봄기운이 돌 때 즈음되어 내 필기 합격 소식과 함께 도서관 붙박이 생활을 막을 내렸다. 시험을 치기 직전까지 공부하다 마중 온 어머니의 차로 집에 돌아갈 때는 어찌나 떨리던지. 매일매일 도서관에 불이 꺼지는 것을 보면서 집에 오곤 했는데도 그날 도서관에 불이 한 칸 한 칸 꺼지던 장면은 눈에 선하다. 나보다 더 늦게 남아 공부를 하던 이들도 있었다. 지금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지만 비슷한 차림으로 하루를 보내며 아닌 척 해도 눈에 익은 사람이 자리를 비우면 오늘은 왜 안 오지, 하는 생각을 하던 사이였다. 점심시간 즈음에 자리를 비우면 앞자리와 옆자리의 사람들의 짐을 내가 봐주는 느낌으로 시간을 보내고 도시락을 가지고 자리를 비우는 나와 눈이 살짝 마주쳤었다. 그들이 정말로 내 짐을 지켜주었을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공부 막바지에 서로의 초조감은 비슷했을 것이다. 


 중학교 삼 학년 무렵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가족들이 이사 온 이후, 그 도서관은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동생의 공부 장소가 된다. 몇 년이나 세월이 지난 다음이기에 도서관의 시스템도 조금씩 바뀌었을 테고 열람실의 사람들과 환경도 바뀌었을 테지만 가끔 들어가 본 도서관은 여전히 그 인쇄물의 향이 섞인 공기를 머금고 있었다. 한동안은 리모델링을 한다고 하던데, 바뀐 이후로는 가 본 적이 없다. 


 수능 공부를 할 때 보다도 더 치열하게 열심히 했던 그날들. 그날들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기에 원하던 목표를 이룰 수 있었다. 그때로 다시 되돌아간다면 그렇게 푹 빠진 기분으로 공부를 할 수 있을까. 아마 간절함에 도서관이 힘을 더해 준 것은 아닐까. 


 지금도 여러 도서관을 가면 열람실에 책으로 벽을 쌓아놓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리고 가끔 그때의 내가 떠오른다. 탈출한 자의 우월감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하지만 그저 그들이 도서관의 열람실에서 책을 모두 정리하고 나올 그 날, 뿌듯하고 시원섭섭한 기분으로 마무리를 했으면 하고 응원을 하게 된다. 




사진출처: unsplash @cant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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