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살이 되다니
늘 너를 생각해. 모두 지운 탓에 남은 사진도 한 장 없어서 너를 상상으로만 만날 수가 있다는 게 조금 슬퍼진다. 내가 아는 너의 얼굴. 거울 속의 너. 이제 막 20대가 되어서 갑작스럽게 낯선 곳으로 가야 했을 네가 생각나. 그렇게 큰 변화가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가 않아 처음엔 얼떨떨했지. 10대가 끝남과 동시에 집을 떠난다는 게 어떤 의미가 될지 그때는 알 수가 없었잖아. 그렇지.
가족들과 사는 것도 버거웠던 네가 기숙사에 들어가 처음 보는 사람들과 사는 게 힘들었을 거야. 너만의 공간에 예민한 네가 혼자서 잠들 수 없다는 것은 생각보다 더 큰 상처가 된다. 너만의 침대가 있었지만 방 안에는 늘 낯선 사람들의 숨소리가 있었어. 같은 방에서 사는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했었지만 잘 안 됐지.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네가 이상하기 때문에, 너무 따지는 게 많기 때문에 그런 거라는 생각을 했을 거야. 그거 때문에 조금 괴로웠지. 하지만 네 탓이 아니야. 그냥 너와 다른 사람들이었을 뿐이야. 그들이 정리하지 않은 이불을 보고 괴로워하지 마. 그들이 세탁기 안에 빨래를 돌려놓고 꺼내는 것을 잊어 네가 그것을 꺼내놓게 되어도 성질내지 말아라. 발을 닦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 것을 봐도 모르는 척 해. 그건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너만 사용할 수 있는 너만의 컵이, 침대가, 수건이, 이불이 처음 생긴 게 기쁘기도 했었지만 그 모든 것들은 공용 공간 안에서만 갖출 수 있다는 사실이 늘 서러웠지. 온전한 너의 것을 가지고 싶어 했어. 너는 그렇게 네가 소중한 사람이었다. 왜 그때는 그걸 몰랐을까.
한동안 그 사실을 모르고 살 거야. 아마 10년쯤은. 그리고 깨달은 뒤에 서러울 거고. 눈앞에 두고도 한 걸음을 못 갔던 길들이 생각나서. 진작에 슬퍼해야 할 것들, 화를 내야 할 일들에 화를 못 냈던 것들이 떠올라서. 그때 너를 위해 울지 못했던 게 속상해.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너였다. 알고 있니?
늘 화가 나 있었지. 너에게 보이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방치되는 것이 힘들 거야. 정리되지 않은 남의 침대를 보는 것처럼. 그걸 네가 함부로 정리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를 가장 괴롭힐 거야. 누군가 자신의 실수에는 너무나 관대하면서 남의 실수에는 야박한 상황을 보면 참을 수가 없을 거다. 자신의 체면이나 기분 때문에 아닌 것을 끝까지 맞다고 우기는 사람도 많을 거야. 기억을 놓고 니은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괴로워. 왜 아닌 것을 맞다고 하지? 왜 맞는 것을 아니라고 하지?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봐. 너 역시 그러고 있다는 것을. 모든 것은 상대적이야. 절대적인 것은 없어. 너의 생각도 그래. 그러니 고집부리지 말아라.
주어진 일은 잘 해내고 싶었지.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고. 완벽하기엔 너에게 보이는 결점들이 너무 많아. 채워지지 않는 단점만 보일 거고 그게 늘어나는 것이 싫어 어떻게든 애를 쓰지만 수습이 되지 않았잖아. 그건 원래 비어있는 자리였기 때문이야. 너무 빽빽하게 메꿔 놓은 벽으론 바람도 들지 않아. 살짝 열린, 혹은 벌어져 있는 곳으로 환기가 된다.
네가 그렇게 단점에, 실수에, 결점에 집착했던 이유는 네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들었던 말들 때문이야. 그건 아직도 나를 괴롭힌다. 처음엔 그런 일이 있었어. 어릴 때 피아노를 배웠잖아. 기억나? 건반 위에는 늘 짙은 색으로 된 부드러운 천이 씌워져 있었어. 손으로 쓸어내리는 방향으로 털이 눕고 일어서면서 색이 미묘하게 바뀌었고.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정해진 음계를 똑같이 누르는 것부터 시작했어. 악보에 도, 레, 미가 그려져 있으면 나도 도, 레, 미를 눌러야 했지. 한동안 피아노는 왜 누르는 게 아니라 친다고 말하는 걸까, 궁금했어. 꼼꼼히 눌러야만 끝까지 소리가 나는 건데. 대충 누르면 대충 나. 그래서 선생님께 많이 혼이 났다. 그 선생님은 내 머리를 자주 때리셨어. 선생님은 늘 내 왼쪽에 앉았는데 수업이 끝나고 나면 자꾸만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어느 날 엄마에게 말했어. 엄마 나 머리가 아파. 왜? 선생님이 때렸어. 엄마는 크게 화를 냈어. 너 뭐 잘못했어!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뭘 잘못했던 걸까. 다른 건반을 누르지 않으려고 손에 힘을 주던 거? 피아노는 너무 크고 나는 너무 작아 페달을 밟지 못했던 거? 선생님이 페달을 밟는 순간에 맞춰 건반을 누르지 못했던 거? 그때부터 너는 잘못하면 맞아야 하는 게 당연해진다.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화나게 한다면 너를 때려도 되는 거라고 생각하게 돼. 특히 그 사람을 네가 사랑하고 있다면. 그게 사랑이라고 믿게 되지. 어떻게든 실수하지 않으려고 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너를 때릴 때 몸에 닿는 체온의 뜨거움이 싫어서 일상생활 속에서의 작은 부딪힘도 싫을 거야. 다른 사람의 살이 너에게 온기가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적어도 네가 기억하는 한은. 화를 내는 사람의 몸은 생각보다 뜨거워. 네가 예상한 것보다 뜨거워서 늘 데고 말았다. 그런 열기에 늘 익숙해져 있었고 거기서 벗어나고 싶었어. 그래서 누가 나를 만지는 거, 보는 거, 말을 거는 것도 싫었어. 가까이 오지 못하게 늘 예민했는데. 다들 내가 까칠하다고 해도 별 상관없었어. 하지만 엄마가 그러면 화가 났지. 너는 애가 왜 이렇게 차갑냐.
이상하지.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 뜨거운데 정작 나는 늘 차가웠어. 그게 내가 온도를 조절하는 방식이었다. 온도를 낮추는 가장 쉬운 방법은 뜨거운 눈물을 바깥으로 흘리는 일이었는데. 그러지 못해 네 안에 고여있는 것들이 팔팔 끓고만 있었다.
그런 말에 익숙해. 너 같은 게 뭘 할 건데. 너 때문에 힘들어서 죽고 싶어. 차라리 뒤져. 신기한 것은 그 말들이 네 안에 쌓여있다가 다시 바깥으로 나오게 될 때야. 모두 너의 입을 통해서 나온다. 그건 다시 너에게로 향해. 화난 손이 네 얼굴을 때릴 때의 충격과 비슷하지. 머리가 흔들리는 느낌이 너무나 싫었어. 그래서 너는 높은 곳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물속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놀이기구를 타지도 못해. 달리는 것도 싫지. 아직도 그래. 나이가 조금씩 들어가면서 더 이상 맞지 않아도 됐지만 그쯤엔 아마, 네가 너를 때리고 있을 거야. 그게 네가 사랑받는 방식이었으니까.
지금의 너에게는 큰 충격이 될 수도 있겠지만. 네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시 사랑받는 게 어떤 기분인지, 이제야 알게 돼. 30살이 되어서. 왜냐하면 그 사람은 아직도 비슷한 방식으로 너를 사랑하고 있으니까.
결국 너는 복수를 한다. 네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그리고 깨달을 거야. 내가 받고 있는 사랑이 엄마가 받았던 사랑이었음을. 사람은 자신이 아는 방식으로 표현을 해. 엄마의 세계에서는 그게 사랑이었다. 그래서 너를 그렇게 사랑한 거야. 네가 엄마처럼 살지 않길 바라니까. 너 역시도 그렇게 다짐을 해.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으려거든 잘 생각하고 해. 그게 진짜 무슨 뜻인지.
그러니까 너까지 그러지는 마. 바보 같은 짓이야. 갚아주려고 하지 마. 그 순간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아도 끝나고 나면 허무해진다.
네가 모든 것을 주어도 돌아오는 것은 언제나 달라. 누군가는 너에게 절반을, 절반의 절반을, 절반의 절반의 절반을 줄 거야. 때로는 아무것도 돌려주지 않지. 그리고 만족할 거야. 거기에 화내지 마. 받아들여봐.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이해하라는 말이야. 그럴 수도 있어. 정당한 곳에 화를 내. 애꿎은 곳에 화풀이하려고 하지 마. 네가 한 선택을 후회하지 마. 자책하지 마. 너를 혼내지 마. 모두가 너에게 하는 것을 너도 하지 마. 너 만큼은 너를 사랑해라.
그냥 웃어넘길 줄도 알아야 해. 배려 없는 농담에 웃어주라는 말이 아니야.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 맞장구 치라는 게 아니야. 어떠한 일이 벌어졌을 때,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야 할 때, 너무 크게 아프고 났을 때. 울면서 곱씹으려고 하지 말고 그냥 털어내라는 거야. 지나간 일은 그렇게 의미가 있는 거야. 적당한 때에 정리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라. 그 일은 거기에 둬. 그리고 너는 나아가야 해.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그게 늘 문제가 돼. 그러지 않아도 된다.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야, 일어나지 않을 일에 너무 많은 체력을 쏟지 마. 정해진 것에서 벗어나는 일을 싫어하기 때문에 판단하고 준비를 하고 싶어 해. 어떤 사람의 표정, 말투에 크게 동요한다. 그게 결국 너를 때릴까 봐. 혹시나 맞게 된다면 그 순간을, 그 이후를 혼자서 감당해야 하니까. 그 불안을 다룰 수 없어서 슬플 거야. 그게 네가 자꾸만 술을 마시는 이유지. 도망가고 싶으니까. 그래서 계속 술을 마셔. 도망갈 수 없다는 걸 아니까.
피할 수 있는 일은 다 피하고 싶었어. 겪지 않아도 될 아픔은 안 겪고 싶었어.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으로 고통받는 게 괴로웠다. 하지만 그게 나를 만들었어. 네가 지금 우는 이유야. 내가 되려고.
그때엔 아마 다 화가 나고 이상해서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있을 거야. 누가 보기에 쟤는 왜 저러지? 싶게. 그래도 너를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고, 싫어할 사람은 싫어한다. 그러니까 다정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 사람 일은 모르는 거야. 어떻게 끝날지 예상하려고 하지 마. 실수하면 어떡하지, 실패하면 어떡하지, 내가 모르는 거면, 틀린 거면, 잘못된 거면. 생각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아. 그러지 않아도 돼.
이런 이야기를 누구도 너에게 해주지 않을 거야. 모두 너를 깎아내리려고만 하지 진정하게 사랑하지 않을 거다. 네가 잘 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 바라지 않는다기 보다는 관심이 없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큰 착각은 다른 사람이 너를 생각할 거라는 거야. 아무도 관심 없어. 그러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해. 그게 중요해.
꼰대같은 말이나 한다고 짜증낼 거 알아. 그때의 너는 지금의 나를 상상도 할 수 없을 거야. 네가 너고, 내가 나이듯. 그때의 네가 할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게 따로 있어. 하지만 변하지 않을 사실은. 누구도 나보다 너를 사랑할 수 없다는 거야. 10년이 지나서야 알게 됐어.
그러니까 즐겁게, 열심히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