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원의 꿈, 잠깐이나마 나를 되찾았던 시간
그날 밤부터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노트북을 켜자마자 가장 먼저 검색한 건 'UC Davis PhD programs'였다.
UC Davis, UC 계열의 명문 종합대학. 바로 옆에 새크라멘토라는 주도(Capital of a state)가 있는 만큼, 정치, 행정, 경영, 사회, 심리 등 다양한 사회과학 분야에 있어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학생과 교수 간의 긴밀한 관계를 중시하며, 선별적이고 제한적인 입학'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이거야말로 내가 원하던 바로 그 환경이었다. 무엇보다 남편도 이 학교에 다니고 있으니까 뭔가 더 어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한편 새크라멘토에도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Sacramento State)가 있었다. 데이비스에서 새크라멘토까지는 차로 20분. 충분히 통학 가능한 거리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희망하는 분야의 박사과정은 없었고, 오직 교육학 박사(Ed.D.) 정도만 제공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UC Davis 홈페이지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교수진 프로필을 하나씩 클릭하며 연구 분야를 확인하고, 내가 연구하고 싶은 주제와 연관이 있는 교수를 찾으면 그들의 논문까지 꼼꼼히 읽어보았다.
"여보, 이거 봐봐!"
새로운 정보를 찾을 때마다 남편을 불러 자랑했다.
"정치경제학 분야에 한국 전문가도 있어. 내 석사 전공이랑 완전 딱이야!"
남편도 내 열정에 감염된 듯 함께 홈페이지를 살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좋은 기회인 것 같아. 너도 공부하고 싶었잖아."
"그렇지? 지원 마감이 12월이라는데, GRE도 다시 봐야 하고... 아, 이거 진짜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는 이미 머릿속으로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GRE 공부는 엘리가 DPNS에 있는 동안 도서관에서 하고, 추천서는 한국 석사 지도교수님께 부탁드리고...
자기소개서에 쓸 이야기는 얼마나 많은가! 미국에서의 경험, 문화 차이에 대한 관찰, 육아맘으로서의 사회과학적 관점까지.
"엄마, 뭐 해?"
어느 날 오후, 노트북 앞에서 GRE 단어장을 펼쳐놓고 있는데 엘리가 다가왔다.
"엄마도 공부하는 거야. 엘리처럼."
"엄마도 학교 가는 거야?"
"그럴 수도 있어."
엘리는 신기한 듯 내 어깨에 기대어 앉았다.
그 순간 마음 한편이 뜨끔했다. 내가 박사과정을 시작하면 엘리는 어떻게 될까? 지금도 DPNS 적응하느라 힘들어하는데, 엄마까지 바빠지면...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오히려 엘리에게도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지 않을까? 공부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여성도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그것도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먼저 엘리가 아팠다. 갑작스러운 고열로 밤새 응급실을 전전했고, 중이염 진단을 받았다.
며칠간 항생제를 먹이느라 밤잠을 설쳐야 했다. GRE 단어장은 식탁 위에서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나는 침대 옆에 앉아 열이 펄펄 나는 엘리를 젖은 수건으로 닦아주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번에는 엘리 턱이 찢어졌다. 남편과 함께 킥보드(미국에선 scooter) 타고 술래잡기를 하다가 그만 앞으로 넘어진 것이다.
"으앙!!!"
피가 철철 흐르는 엘리를 데리고 또다시 응급실로 향했다.
"음.. 이건 찢어진 상처네요. 실로 꿰매야 할 것 같습니다."
의사의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흉이 남지는 않을까요?"
"어느 정도 티는 날 거지만, 자라면서 점점 없어질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은 우리를 커튼으로 칸막이가 쳐진 처치실로 안내했다.
"왼쪽은 간호사가, 오른쪽은 아빠가 잡아주세요."
무서워 난리를 치는 엘리를 고정시킨 채 의사 선생님이 한 땀 한 땀 턱의 상처를 꿰매기 시작했다.
"으아아악! 엄마아!"
엘리의 울음소리가 처치실을 가득 채웠다. 나는 엘리의 손을 꼭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다 끝났어요. 턱 밑이라서 다행히 정면에서 보면 잘 안 보일 거예요."
의사 선생님의 위로에 온몸의 긴장이 쭉 풀렸다.
집으로 돌아와 엘리를 재우고 나서, 나는 식탁 위에 놓인 GRE 단어장을 바라봤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희망으로 가득했던 그 책이 이제는 왠지 무거워 보였다.
엘리의 상처를 돌보며 문득 깨달았다. 내가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던 건 아닐까?
박사과정이라는 꿈과 엄마라는 현실 사이에서, 과연 내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까?
아이 하나 제대로 돌보는 것도 이렇게 벅찬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