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기가 아닌 포기
박사과정 진학을 고민하면서 가장 현실적으로 부딪히는 문제는 육아였다. 엘리를 혼자 키워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 문제는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엘리를 키우는 데 있어 남편은 한국에서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결혼 후 예기치 못하게 생겼던 허니문 베이비, 엘리. 남편은 엘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너무 바빴다. 우리가 결혼한 게 신기할 정도였다. 그렇게 바쁜 사람이 어떻게 매일 보자고 하고, 결혼도 일사천리로 만난 지 8개월 만에 했을까.
잦은 해외 출장으로 한 달 중 2주는 해외에 있어야 하던 사람. 자정에 집에 돌아오면 '왜 이렇게 빨리 왔어?'라고 물어보게 만들었던 사람. 주말에도 최소 하루는 회사일을 해야 했던 사람. 나머지 그 하루도 온종일 자느라 바빠서, 내게 남편 사진은 오직 잠자고 있는 사진뿐이었다.
그래도 나는 괜찮았다. 남편의 바쁨을 이해했다. 모르고 결혼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그 끝에 빛나게 될 남편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도 퍽 즐거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달랐다.
엘리가 태어나고 나서 3일 만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야 했던 남편이 야속했고, 엘리가 태어난 후 안면마비가 온 나와 엘리를 친정에서 보살피게 만든 남편이 실망스러웠다. 힘겨워하는 친정엄마 모습에 출산 후 100일도 안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회사일에 너무 바쁜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남편은... 남편 나름의 최선을 다하긴 했다. 회사에서 새벽 2시에 돌아와서도 식기세척기를 돌렸고, 빨래를 갰고, 나중에는 주말에 회사에 출근할 때 엘리를 같이 데려가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육아를 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정말 잠깐이라도 아이를 돌봐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루 24시간 동안 아이를 전적으로 키우다 보면 피로가 누적되고 누적되어 견딜 수 없어지는 시간이 온다. 돌이킬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30분, 혹은 1시간이라도 아이와 떨어져 쉼표를 찍어줘야 한다. 아무리 체력이 좋은 사람도, 얼마나 오래 견디냐의 문제일 뿐 결국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건 마찬가지다.
그런데 그 도움이 가장 필요했던 시기에 남편은 내 옆에 없었다. 결국 내 몸은 출산 후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고, 내 마음에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았다.
그렇게 일을 한 보상으로 유학을 올 수 있었고, 미국에 와서는 그래도 남편이 예전보다 많이 도와주려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전적으로' 엘리를 챙기지는 못했다. 결국 주 양육자 포지션은 나의 몫이었고, 게다가 남편은 Bar 준비 때문에 엘리를 잘 챙길 여력도 없을 터였다.
물론 Bar exam을 보라고 설득한 것도 나, 그리고 남편을 서포트하겠다고 다짐한 것도 나였다. 하지만 이런 내 희생 끝에 뭐가 남을까 생각하면 걱정과 한숨만 나왔다.
지금 이 타이밍이 아니라면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 꿈의 끝자락이라도 잡고 싶었다.
하지만 엘리가 응급실 신세를 계속 지게 되면서, 내가 너무 오만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해외에서 만 3세를 키우면서 남편의 커리어를 뒷받침하면서 동시에 내 꿈도 추구하다 보면,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한 채 엘리에게 상처만을 남긴 채 한국으로 돌아갈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엄습해 왔다.
경제적 현실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박사과정 학비는 연간 3만 달러가 넘었다. 캘리포니아 거주자라고 해도 1만 5천 달러는 족히 들었다. 거기에 베이비시터 비용까지 생각하면... 현재 우리 가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었다. 펀딩을 받아도 추가로 빚을 져야할 것이였다.
하지만 경제적인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엘리의 미래였다. 과연 엄마가 없는 엘리가 제대로 성장할 수 있을까? 국내도 아닌 해외에서, 원어민이 아닌 아이에게 엄마의 존재는 더욱 절실할 텐데 말이다.
내가 대학원에 다니려면 반드시 베이비시터를 고용해야 했고 고향인 한국에서 이향만리 떨어진 미국에서는 일가친척 하나 없는 고아와 같은 신세였다.
설사 베이비시터를 고용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영어도 완벽하지 않은 아이를, 한국에서 온 지 1년밖에 안 된 아이를 낯선 사람에게 맡긴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일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잘못하면 엘리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를 남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쉽사리 대학원 진학을 결정할 수 없었다.
그날 밤, 엘리를 재우고 나서 거울 앞에 다시 섰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반짝이던 내 눈이 다른 의미에서 깊어지고 있었다.
"그래, 접자."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정말 완벽한 아내, 그리고 엄마가 되어보자!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고, 하나를 얻으려면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포기할 때 포기 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한 것 아닐까?"
공부는 나중에 해도 되지만, 지금의 엘리는 지금 뿐이야.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생각하자.
그렇게 나는 또 한 번 나의 꿈을 접었다. 아니. 마음을 다 잡았다. 노트북 즐겨찾기에서 UC Davis 대학원 폴더를 삭제했다.
하지만 그날 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남편 덕분에 미국에 왔지만, 남편 때문에 내 꿈을 포기해야 한다. 그래야 가정이 잘 굴러갈 수 있을 테니까.
이런 고민은 왜 아직도 변하지 않는지...
엄마 역시 졸업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런 고민을 했다고 했다.
세월에 30년이 넘었는데 그때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이런 것이 해결되어야 저출산이 해결될 텐데 말이다.
나는 포기했지만, 세상이 바뀌지 않으면 누군가는 또 같은 포기를 해야 할 것이다.
딸이든, 며느리든, 누구든.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언제나처럼 엘리를 데리고 West Manor 놀이터에 갔다. 꽤 커 보이는 소녀가 막내동생을 데리고 놀고 있었다.
"엄마는 어디 가고 너가 동생을 데리고 나왔니?"
"Mom is at school. Dad's coming soon to pick us up."
"School? What kind of school?"
"Graduate school at UC Davis."
대학원? 더 자세히 물어보니, 삼남매를 키우면서 박사과정을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엘리 하나도 벅차서 포기했는데, 세 명의 아이를 키우면서 박사과정을?
집에 돌아오는 길, 갑자기 숨이 깊어졌다. 한동안 얕게만 쉬고 있었던 것 같았는데, 이제야 폐 깊숙이까지 공기가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래, 이건 포기가 아니야. 미뤄둔 거야.'
얼어붙었던 가슴 어딘가에서 뭔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깊이 잠들어 있었을 뿐이었구나.
그날 밤, 엘리를 재우고 나서 잠이 오지 않았다.
삼남매를 키우면서 박사과정을... 계속 그 생각이 맴돌았다. 어떻게 가능한 걸까?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고 있다는 것. 완벽하지 않더라도, 방법을 찾아가며 버티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도, 지금과는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상쾌한 바람이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것 같은 밤이였다.
< '엄마'가 대학원에 가기 전, 현실적 고려사항 >
- 육아와 학업 병행의 어려움: 대부분의 박사과정이 풀타임을 요구하며, 아이를 돌보면서 연구에 집중하기 어려움
- 경제적 부담: 학비 외에도 베이비시터, 교통비 등 추가 비용이 상당히 발생
- 가족의 지원: 배우자의 적극적 지원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
- 언어적 장벽: 논문 작성, 발표 등에서 원어민 대비 훨씬 많은 시간이 소요됨
- 네트워킹: 학회 참석, 교수와의 미팅 등 사회적 활동에 제약이 많음
- 졸업 후 진로: 취업 시장에서 외국인으로서 겪는 현실적 한계들이 존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