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도 한달 전기료 400불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밤이 되면 어느새 추위가 찾아오는 11월의 데이비스.
비가 오는 소리와 어둑해지는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찌개를 끓이려는 순간, 집 안이 칠흑같은 어둠에 잠겼다.
"또야?"
남편의 한숨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또'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데이비스에서의 정전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이었다. 여름에는 에어컨을 많이 틀어서 그런지 한낮에 정전이 났었다. 그런데 겨울이 다가오니 저녁부터 밤 사이에 정전이 자주 나는 것 같았다.
"엄마, 무서워..."
엘리가 내 다리를 꼭 껴안았다. 창밖의 가로등마저 꺼진 걸 보니 우리 집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손전등을 찾아 서랍을 뒤적이는 남편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저번에 캠핑 준비하면서 남편이 코스트코에서 손전등을 많이 사둔게 이렇게 도움이 되었다.
LED 손전등 불빛 아래 모인 우리 가족. 전기레인지라 요리는 당연히 불가능. 다행히 밥솥에 남은 밥에 참기름과 김치를 넣어 비벼 먹었다.
"캠핑 같아요!"
엘리가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맞다. 얼마 전 DPNS에서 같이 캠핑장에서도 이렇게 손전등 불빛에 의존해 저녁을 먹었었다. 아이의 순수한 시선이 상황을 다르게 보게 만들었다.
하지만 낭만은 거기까지였다.
PG&E 앱을 확인하니 '예상 복구 시간: 자정'이란다. 6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었다. 핸드폰 배터리는 45%. 보조배터리는 어디 뒀더라?
"한국에선 태풍 와도 정전 안 됐는데..."
투덜거리는 내 말에 남편이 쓴웃음을 지었다.
"한전은 공기업이니까. 여긴 PG&E가 사기업이잖아. 서비스는 개판인데 전기료만 비싸게 받아먹지."
실제로 우리 집 전기요금은 매달 300불, 즉 40만원이 훌쩍 넘는 비용이 나왔다. 한국에서 스타일러에 세탁기까지 쓸거 다 쓰고도 20만 원 수준이었던 걸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금액이었다.
그날 밤, 우리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전기 없이는 할 수 있는게 없었으니까. 그러다 잠결에 전자제품들이 '삐삐' 소리를 내는 걸 들었다. 전기가 돌아온 것이다.
얼핏 본 핸드폰 화면에는 새벽 2시라고 떠 있었다. 8시간 동안 복구가 안되다니, 이번에는 꽤 힘든 작업이었나보다.
다음 날 DPNS에서 Katy 할머니를 만났을 때 물어봤다.
"어제 정전 때문에 고생했어요. 여기는 원래 정전이 자주 있나요?"
"Oh, yes! 비 오거나 바람 불면 십중팔구야. 작년엔 하루 종일 정전된 적도 있었어. 발전기 사는 집도 많아."
발전기라니. 21세기에, 그것도 실리콘밸리 옆 동네에서 발전기를 사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데이비스에 정전이 자주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이 아직도 전봇대를 사용하기 때문이었다. 한국은 서울이나 신도시들의 전선 지중화율이 90%에 달한다. 땅 속에 전선을 묻어두니 태풍이 와도, 폭설이 내려도 정전 걱정이 없다.
반면 미국의 전깃줄 지하 매설 비율은 25%를 넘지 못한다고 한다. 그래서 심한 바람에 전봇대가 쓰러지고, 혹은 나무가 꺾이면서 전깃줄을 끊어뜨리는 사고가 잦을 수 밖에 없다.
더 웃픈 건, 소비자들도 매설비용이 곧바로 전기요금 인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정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이다.
"전봇대와 함께 사는 삶이 미국인의 선택이라니..."
21세기 첨단 국가 미국의 아이러니였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불과 3개월 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머, 아직도 CARE 프로그램 신청 안 하셨어요?"
한달 전에 UC Davis 유학생으로 온 남편의 선배를 우연히 마트에서 만났다.
"CARE요? 그게 뭔데요?"
"PG&E에서 저소득층한테 전기요금 할인해주는 프로그램이에요. 30-35% 할인받을 수 있는데... 학생 비자로 와서 미국에서 돈 버는 게 없으면 당연히 해당되죠!"
순간 머리가 하얘졌다. 매달 300불씩 꼬박꼬박 내던 전기요금. 1년 반 동안이면...
"하... 최소 1,500불은 더 냈네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안 그래도 빡빡한 예산이었다.
'남편은 학교다니면서 이런 정보도 못 알아오고 뭐하는 거람.'
속으로 남편 욕을 하면서 PG&E 홈페이지를 뒤져보니 정말이었다. CARE 할인은 최대 2년간 적용되고, 고정 수입이 있는 경우 4년까지 연장된단다. 우리 같은 유학생 가족은 당연히 자격이 되는데...
"여보, 이거 알고 있었어?"
핸드폰 화면을 들이밀자 남편이 멀뚱멀뚱 쳐다봤다.
"어? 이런 게 있었어? 학교에서도 아무도 얘기 안 해줬는데..."
"그러니까! 매달 300불씩 내면서도 몰랐다니. 1년 반이면 진짜... 아, 생각할수록 속 터진다."
"미안... 나도 몰랐어."
풀이 죽은 남편의 모습에 더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어차피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까.
"에휴, 그냥 비싼 수업료 냈다 치자. 앞으로 3개월이라도 할인받으면 되지 뭐."
결국 그날 밤, 우리는 CARE 신청서를 작성했다. 이미 지나간 1년 반의 전기요금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적어도 남은 기간만이라도 혜택을 받을 수 있으니 다행이랄까.
"근데 진짜 미국은... 알아서 챙겨야 하는 게 너무 많아."
남편이 중얼거렸다. 맞는 말이었다. 모든 게 DIY(Do It Yourself)인 나라, 그게 바로 미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