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도 다 빠진다구요???
"앗."
설거지하던 고무장갑을 벗는 순간, 엄지손가락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또 갈라졌다. 빨간 피가 새어 나왔다. 데이비스에 온 지 1년쯤 지났는데, 내 손가락은 누더기가 되어 있었다.
"엄마 손 아파?"
엘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괜찮아. 곧 나을 거야."
더 이상 한국에서 애지중지 가꿨던 내 손은 온데간데 없었다. 손끝에 하얗게 일어난 각질은 거북이 등껍질처럼 갈라져, 어느새 깊은 틈새를 만들며 은근한 통증을 안겼다.
처음엔 건조한 날씨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리 로션을 발라도, 핸드크림을 덕지덕지 발라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심해졌다. 유튜브를 찾다보니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미국 가면 피부 다 망가지고 머리 다 빠져요. 왜 그런지 아세요? Hard water라고 석회질이 엄청 많아서 그래요."
그러면서 추천한 제품이 바로 O'Keeffe's Working Hands. 보통 바세린과는 차원이 다른 쫀쫀함. 보습의 끝판왕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요령이 생겼다. 설거지할 땐 무조건 고무장갑, 샤워 후엔 바로 로션, 잠들기 전엔 Working Hands를 바르고 비닐장갑 착용. 이 모든 과정을 거쳐야만 hard water의 침공으로부터 피부를 지킬 수 있었다.
하지만 Working Hands로는 내 머리카락을 지킬 수 없었다. 15년 전 교환학생 경험을 떠올려 한국에서 샤워 필터까지 가져왔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일반 샤워 필터는 염소만 걸러줄 뿐, 석회질은 거의 제거하지 못한단다.
그래서였을까. 샴푸가 잘 씻기지 않았고, 아무리 린스를 해도 머릿결은 푸석푸석해졌다. 그때부터 clarifying 샴푸를 찾기 시작했고, 매번 마지막 헹굼엔 정수물이나 사과식초 희석수를 써야 했다. 샤워 후엔 꼭 두피 보습제를 발라야 가려움이 잠잠해졌다.
21세기 미국, 그것도 캘리포니아에서 깨끗한 물 때문에 이렇게 고생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마시는 물을 구하는 것도 고역이었다.
처음에는 코스트코에서 물을 사 마셨다. Crystal Geysers 생수, 500ml짜리 40병들이 한 팩, $4.99. 하지만 늘어나는 쓰레기가 감당이 안되서 1갤런짜리 6통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문제가 생겼다.
무거운 물통을 들고 2층 계단을 오르는 남편의 허리와 무릎이 슬슬 고장나기 시작한 것. 삐걱대는 소리가 계단 때문인지 남편의 무릎 때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아이고, 허리야..."
아직 30대인 남편의 허리를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이런 일로 못 쓰게(?) 만들 수는 없었다.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역시나 정수기.
한국에서처럼 정수기를 설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다. 상담해보니 hard water가 심해서 무조건 '역삼투압' 방식의 정수기를 써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3개월마다 필터를 교체해야 한다고. 필터 교체비만 100불.
게다가 설치를 위해서는 '구조 변경'이 필요할 수 있어서 leasing office의 허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까지. 갑자기 올해 봄에 있었던 세탁기 물난리 사건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leasing office... 허가...?'
한 번 물난리가 난 집에 또다시 '물'로 뭔가를 한다고 이야기하면 절대 안해줄 것 같았다.
무엇보다 수돗물 자체에 대한 불신이 컸다.
"이 아파트, 40년 된 아파트야. 밖에는 납 주의 표지판도 있다고!"
물론 납은 페인트에 섞인 납을 의미했지만, 여하튼 정말 오래된 아파트. 상수도관의 상태가 의심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한 건 '물 배달'.
인터넷에 찾아보니 ReadyRefresh라는 회사가 있었다. Yelp에서 5점 만점에 1.1점. 배송 서비스에 대한 불만이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스트코에서 물을 사오느라 남편의 허리가 부서지거나, 정수기를 설치하느라 leasing office의 허가를 구하는 것보다는 나아보였다. 게다가 replenishment (물통을 수거해가면서 물값을 할인해 주는 서비스)로 돈도 아낄 수 있으니 금상첨화였다.
그렇게 시작된 물 배달 서비스.
Replenishment가 가능한 5갤런짜리 물통 6개를 배달시켰다. 약 19리터, 쌀 한 가마니 무게의 물통이 문 밖에 배달되면 베란다(porch) 밖에 놓는 것은 남편의 몫.
그리고 그 위에다가 아마존에서 산 전동 디스펜서를 올려놓으면 준비 끝이었다.
이제야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겨울이 되자 디스펜서가 고장 났다.
"이런 싸구려!"
$40짜리 기계를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원시적인 방법을 택했다.
5갤런짜리 물통을 기울여 주전자에 물을 담으면, 주전자에서 1갤런 통에 물을 채웠다. 그렇게 6번을 반복하면 5갤런짜리 물통 하나가 다 비워지게 된다.
이어지는 남편의 한탄.
"아 진짜 21세기에 이게 뭐하는 짓이야?"
하지만 의외로 이 방법이 가장 확실했다.
갈라진 손도, 19리터 물통도, 매일 아침 물 나르는 일도, 모두 추억이 되었다.
삶을 살아갈 때는 참 힘들었지만, 지나고 나면 '그때가 좋았다'고 생각되고 마는 것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 Hard Water 생존 팁 >
1. 피부 관리 필수품
- 샤워필터 설치 (피부와 머리카락 보호)
- O'Keeffe's Working Hands (초강력 추천)
- 고무장갑 여러 개 (설거지용, 청소용 구분)
- 네오스포린과 밴드 (갈라진 상처 관리)
- 비닐장갑 (취침 시 로션/연고 후 착용)
- 세타필, 세라비 같은 순한 핸드로션 (아이들은 더 순한제품 사용)
- 가습기 필수 (겨울철 건조함 대비)
2. 마시는 물 공급 방법 (음용수는 반드시 정수된 물 사용)
- 초단기: 코스트코 40병 팩 ($4.99)
- 중기: ReadyRefresh 활용
- 장기: PO(역삼투압 필터) 정수기 설치 고려 (설치하려면 임대인 허가 필수!)
3. 청소 팁
- 식초로 석회 제거 (수도꼭지, 샤워기)
- 유리그릇은 레몬으로 닦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