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밥, 전통놀이, 그리고 '바나나 차차'로 채운 "Korean Day"
새벽 5시. 부엌이 전쟁터다. 오늘, DPNS에 김밥 25줄을 살포하는 날이기 때문.
시금치부터 잘 씻고, 뜨거운 물에 한번 데쳐서 물기가 빠지게 쌓아 놓았다. 그 사이 남편은 당근을 참기름에 볶았다. 그래도 다행히 채 썬 당근을 팔아서 다행이다. 당근을 볶고 남은 기름을 활용해서 계란 지단을 부치고 햄을 볶는데까지 걸린 시간이 약 한 시간. 그 사이에 앉혀둔 밥은 이미 다 된채로 밥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이 밥솥의 밥에 기름과 맛소금을 치면서 한숨을 쉰다. 하필이면 Property 수업이 11시부터라고. 수업을 빠지기는 어려워서 세션 1만 참여하고 가야 한단다.
'오늘은 좀 빠질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Bar 시험까지 3개월. 중요한 과목이라는데 수업을 빠지라고 하기가 어려워 속으로만 삭였다.
엘리는 어제 꺼내놓은 한복을 벌써 입고 있었다. 하얀 저고리에 분홍색 치마. 작년 추석에 한국에서 사온 건데 벌써 팔목이 짧아 보인다. 아직 네 시간이나 남았는데도 지금 당장 입겠다고 떼를 쓴다. 엄마 아빠가 김밥을 대량으로 만드느라 바쁜 건 보이지 않나 보다.
4월의 데이비스 날씨는 참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공기는 봄이나 가을처럼 청량한데, 햇볕은 이미 여름처럼 뜨겁다. 그 차가움과 뜨거움 사이 어딘가에 있다보면 나도 모르게 붕 떠있는 듯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오전 9시. DPNS 팬트리 앞.
Korean Day Session 1 시작.
딱지와 제기들을 준비한 채, 우리는 한복 차림으로 아이들을 맞이했다. 아마도 미국인들에게는 생소할 복장.
중국의 치파오와 일본의 기모노는 각종 컨텐츠와 서브컬처 등에서 많이 다루었지만, 우리나라 한복은 미국의 문화에서 소외되어 왔다. 당시 기생충과 BTS로 인해 우리나라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지만, 미국인들이 생각하는 K-culture에 우리나라의 '전통'은 없었다. 그랬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은 K-pop Demon Hunters 덕분에 우리나라의 전통 복장과 캐릭터에 열광한다고 하니,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격세지감마저 든다.
저 멀리서부터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드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옷이 신기한지 엘리 치마를 만져보는 아이도 있었는데, 실크의 매끈한 촉감이 마음에 들었는지 "공주옷이다!"라고 소리쳤다.
몇몇 부모들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을 찍기도 했다. 다들 웅성거리면서 우리가 Korea에 대해 무엇을 보여줄 지 기대와 흥미를 보이고 있을 즈음, 남편이 먼저 제기를 꺼냈다.
'이 날을 위해 우리가 부단한 준비를 했지. 남편! 보여줘!'
남들 앞에서 멋지게 제기차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며칠 전부터 West Manor Park에서 열공했던 우리다. 나는 치마를 입었기 때문에 전통놀이 세션에서는 남편이 선보이기로 했다.
남편 손에 들린 빨간 술이 바람에 팔랑인다.
바람이 잦아들 즈음, 손에 든 빨간 제기가 하늘로 솟구친다.
하늘에 점을 찍고 낙하하는 빨간 물체.
가속도가 붙으며 떨어지는 찰나, 발과의 입맞춤.
태양과 같이 다시 하늘로 회귀하는 제기의 모습.
그렇게 10번 가량 안정적으로 제기를 차낸 남편은 마지막으로 하늘 높이 제기를 차냈다.
아이들의 입이 한가득 벌어지고, 다들 자기가 해보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생각보다 제기차기가 잘 안되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연습하지 않고 처음부터 제기를 잘 차는 건 무리겠지. 제기들이 중구난방으로 떨어졌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단지 제기의 술이 반짝반짝 빛나는게 이쁜지, 손에 쥐고 춤을 추기도 했다.
그 다음은 딱지 차례.
딱딱한 종이로 접어온 딱지 4개를 바닥에 쏟아낸다. 빨강색과 파랑색 딱지들이 콘크리트 바닥에 흩어진다.
남편이 시범을 보였다. 손목을 이용해서 스냅을 주니... 탁! 깔끔하게 뒤집혔다.
그 순간부터 팬트리는 전쟁터가 되었다. 4개 밖에 준비하지 못했던 딱지를 서로 집으려고 쟁탈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서둘러 진정시킨 후, RED팀과 BLUE팀으로 나누어 차례차례 딱지치기를 시켰다.
탁탁탁탁. 콘크리트가 울리고, 그 사이로 피어오르는 먼지까지. 마치 어릴 적 우리 동네에서 딱지치기했던 그 모습이 미국 소도시 데이비스에서 펼쳐졌다.
어느덧 세션 1 시간이 끝났다. 벌써 해는 중천으로 올라가 그 위상을 뽐내고 있었고, 두꺼운 한복을 입고 열심히 제기차기와 딱지치기를 도와준 남편은 땀으로 뒤덮였다.
이제 남편은 Property 수업을 들으러 가야할 시간. 미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고 출발하는 남편의 모습이 야속하기 그지없었다. 나 혼자 세션 2를 이끌어야 한다니, 너무 암담했다. 왜냐하면, 세션 2에서는... 바나나 차차 노래에 맞춰 율동도 가르쳐야 했기 때문이다. 참고로, 나는 몸치다.
나는 서둘러 교실로 이동했다. 미리 노트북과 빔 프로젝터를 설치해야 했기 때문. 다행히 Teacher Becky가 도와줘서 제 때 프레젠테이션을 띄울 수 있었다.
"여러분, 오늘은 Korean Day에요. 여기 Ellie 엄마가 Korea에 대해서 알려줄 거에요. 모두 박수!"
"와!"
형형색색 다양한 눈동자들이 나를 향한다. 기대와 설렘이 가득한 눈동자들. 나는 그 마음에 부응해주기로 했다.
가장 먼저 띄운 건 한국에서 찍은 우리 가족 사진. 전통 기와집에서 한복을 입고 찍은 터라, 한국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이들에게 퍽 이국적인 사진이었을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세계 지도 속에서 한국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Korea를 들어본 미국인들도 정작 Korea가 어디에 있는지는 잘 몰랐다. 이렇게 작은 나라에 5,000만여 명이 산다고 말해주니, 다들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어지는 슬라이드. 김치, 불고기 사진에 이어 아기 상어가 나오자 교실이 들썩였다. 미국에서도 아기 상어(baby shark)는 유명한 모양이었다. 노래까지 아는 아이들도 있는지 저절로 흥얼거림이 터져나왔다. 뒤이어 타요 버스를 보여주니 넷플릭스에서 봤다며 소리쳤다. BTS와 블랙핑크, 그리고 오징어 게임 포스터가 나오자 아이들보다는 학부모들 쪽에서 큰 호응이 나왔다.
마지막 슬라이드. 바나나 차차.
뽀로로 캐릭터들이 나와서 율동을 추는 영상을 트니 아이들의 몸이 벌써부터 들썩였다. 이제 내가 나서야 할 시간.
"여러분, 우리 율동을 한 번 배워 볼까요?"
미리 중요 파트별로 쪼개서 올려둔 동영상에 힘입어, 아이들에게 율동을 가르쳐주었다. 집에서 미리 춤을 배워둔 엘리도 내 옆에서 열심히 율동을 추었다.
엘리의 ex-boyfriend 램지도 한 가운데로 뛰어나와 힘차게 율동을 따라했다. 다른 아이들도 "banna cha cha" 하면서 팔 다리를 열심히 흔들었다.
세션 2를 무사히 마친 후, 스낵 타임.
선생님들과 함께 각 테이블에 김밥을 나눠주었다. 아이들 입 크기를 고려해 미니 김밥으로 잘랐더니 만드는데 두 배로 오래 걸렸다. 새벽부터 고생한 이유가 여기 있었다.
채식주의자 가족을 위해 햄 뺀 버전, 계란 알레르기 있는 아이를 위해 지단 뺀 버전, 둘 다 빼고 야채만 넣은 버전까지. 다양한 베리에이션으로 만드려다 보니 그것도 고역이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정말 잘 먹었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한 입 베어 물던 아이들이 두 개, 세 개씩 가져간다. 단무지 아삭거리는 소리가 교실에 가득하다.
새벽부터 김밥 말고, 한복 입고, 전통놀이하고, 프레젠테이션 준비하고, 율동 추고, 김밥 나눠주고... 아직 오전이 다 가지 않았는데도 기진맥진했다. 좀 쉬려는 그 때, Katy 할머니 손자 울프가 다가왔다.
"Is there more?"
안타깝게도 없다. 25줄이 벌써 동났다. 그래도 Katy 할머니와의 쿠킹클래스가 있으니, 그 때 김밥이나 유뷰초밥을 만들면 되겠다 싶었다.
"지금은 없고, 나중에 만들어 줄게."
그 사이, 엘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친구들에게 자랑한다.
"My mommy made this! 김밥 최고!"
친구들이 엘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본다. 나도 덩달아 어깨가 펴진다.
Parents' meeting까지 끝나고, 엘리와 한복을 챙겨 차에 탔더니, 온 몸에 힘이 풀렸다.
출발 전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업에 늦지는 않았어?"
"아 다행히 늦지는 않았어. 미안한데 김밥 남은 거 있어?"
"다 먹었어. 울프가 더 달라고 했을 정도야."
"헐... 나도 먹고 싶었는데."
"그러게 수업 빠지지 그랬어."
"그럴걸 그랬나봐. 그래도 오늘 수업 안들었으면 큰일날 뻔. 혼자 공부할 땐 잘 이해가 안가는 부분이었거든."
오늘 우리는 데이비스의 작은 프리스쿨에 한국을 심었다. 김밥 25줄과 바나나 차차, 그리고 빨간 술 달린 제기와 알록달록한 딱지로.
남편은 김밥으로 배를 채우는 대신 Property 수업에서 부족한 걸 머리에 채웠다니 다행이다. 그의 행동이 비록 내 마음에는 차지 않았지만, 이해하려 노력했다. 미국에 있을 때 딱 1번만 볼 수 있는 시험, 본인도 중압감에 눌리고 있을 터였다.
그래도 괜찮다. 적어도 울프가 "더 없냐"고 물어봤으니까. 그게 최고의 칭찬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