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 you make a magic for me?
어느덧 4월. 데이비스의 봄 날씨는 한마디로 표현하기가 참 어렵다. 아침저녁으로는 아직 겨울의 찬 기운이 남아 있지만, 오후의 햇살은 여름을 예고하듯 뜨겁게 내려앉는다. 마치 겨울과 봄, 그리고 여름의 기운이 하루 속에 뒤섞여 드러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엘리가 DPNS에 다닌 지 벌써 7개월,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한 달 뒤면 1년이라는 대장정(academic year)이 끝나고 긴 여름방학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어느 목요일, 그날은 매주 돌아오는 나의 duty day였다. 아침 8시 반부터 오후 1시까지, 언제나처럼 보조교사로서 선생님을 도와 교구들을 준비하고, 아이들 코 닦아주고, 놀이터에서 감독하고, 점심 먹이고, 설거지하고.
드디어 정규 시간이 끝난 후 열리는 학부모 회의(parents meeting).
보통 parents meeting에서는 그날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예컨대 누가 바지에 쉬를 했니, 누구와 누가 싸웠니, 어떤 일이 힘들었니 같은, 사소하지만 모두가 인지해야 할 내용들.
하지만 오늘은 Teacher Becky가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This week, we'll have parent-teacher conferences after the parents meeting."
한 학년이 끝날 때 즈음 부모와 아이의 성장 및 발달에 대해 상담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물론 다른 학교나 어린이집과는 다르게 매주 한 번씩 보조교사로 참여하고 있지만, 선생님 눈에는 엘리가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했다. 아무래도 부모가 보는 엘리와 선생님이 보는 엘리는 분명 다를 테니까.
집에 돌아와 남편의 학사 일정에 맞춰 상담 일자를 잡았다. 나도 남편이 엘리를 '함께' 키운다는 생각으로 육아에 임했으면 했다. 다행히 남편도 함께 참여하고 싶어 했다.
상담 전에 부모가 생각하는 엘리의 성장 수준도 미리 작성해가야 했다.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항목을 하나씩 채워나갔다.
<Parent Pre-Conference Questionnaire: Ellie>
- 사회성/감정 발달 (Social/Emotional):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데 주저함이 없다. 특히 Ramsey와 가장 친하게 지낸다. 자기감정 표현에 솔직한 편(가끔 너무 솔직해서 문제). 낯선 어른에게는 여전히 수줍음이 많지만, DPNS 선생님들과는 매우 친밀하다.
- 신체 발달 (Physical): 대근육은 최고 수준. 하루 종일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음. 미끄럼틀, 그네, 자전거 등 모든 야외 활동을 사랑함. 한편 소근육의 경우, 연필이나 붓 잡는 것을 아직은 어색해하지만 그림 그리기와 가위질에 흥미를 보이기 시작함.
- 인지 발달(Cognitive): 언어적인 부분은 지난 7개월간 가장 크게 발전함. 복잡한 문장은 아직 어렵지만, 원하는 것을 표현하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인다. 집에서 혼자 옷 입고 벗기, 화장실 가기 등은 완벽하게 가능. 문제는 식사 시간. 한 시간 내내 밥그릇을 붙잡고 있을 때가 많음. 장난감 정리(clean-up)는 기분에 따라 복불복.
종이를 채워나가며 우리는 지난 7개월간 엘리가 얼마나 훌쩍 자랐는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문득 학업을 포기해야 했던 우울했던 시간들이 이 순간을 위한 것이었나 싶었다.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 속에서 깊이 머물렀기에, 아이의 작은 변화와 성장의 순간들을 고스란히 품을 수 있었던 것 아닐까.
그렇게 상담일이 다가왔다. 상담 시간보다 좀 이르게 도착한 우리는 교실 밖 야에서 기다렸다. 엘리는 다른 상담 대기 중인 부모들이 데려온 아이들과 블록을 쌓으며 놀고 있었다.
"저 애가 벌써 7개월째 여기 다니고 있다니."
남편이 엘리를 보며 말했다.
"그러게. 처음엔 울면서 안 간다고 했는데."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School today?'부터 물어보잖아."
맞다. 주말마다 "No school today"라고 하면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다. 특히 월요일 아침엔 일찍 일어나서 혼자 가방을 챙기려고 한다. 물병 넣고, 여분 옷 확인하고.
"Ellie's family?"
드디어 우리 차례였다.
상담실로 들어가니 Teacher Becky가 두툼한 폴더를 펼쳐놓고 있었다. 거기엔 엘리의 이름이 적힌 라벨이 붙어있었다.
"Thank you for coming! 엘리 아빠도 오셨네요."
남편이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했다. 평소 duty day는 주로 내가 하다 보니, 남편은 Teacher Becky와 제대로 대화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So, Ellie has been doing really well!"
Teacher Becky가 밝은 표정으로 시작했다. 선생님이 미리 엘리의 발달 수준에 대해 작성한 내용들을 보여주면서 설명했다.
"처음 몇 달은 적응 기간이었죠. 특히 언어 면에서. 9월엔 한국어만 썼는데, 이제는 거의 영어만 쓰려고 노력해요."
"집에서도 그래요. 한국어로 물어봐도 영어로 대답하려고 하고."
"Circle Time 참여도도 많이 좋아졌어요. 처음엔 그냥 앉아만 있었는데, 이제는 노래도 따라 부르고, 손동작도 따라 해요. 아직 발표하는 건 좀 어려워하지만, 그건 성향이니까요."
"그런데..."
Teacher Becky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Ramsey랑 너무 친해서 가끔 Circle Time에 집중을 못 할 때가 있어요. 둘이 계속 킥킥거리고 장난치느라."
아... Ramsey said this, Ramsey did that, Ramsey is my best friend...
매일 저녁밥 먹으면서 듣는 그 이름, 램지.
"어제 정말 재미있는 일이 있었어요."
Teacher Becky가 갑자기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엘리가 제게 와서 'Teacher Becky, can you make a magic for me?'라고 했어요."
나와 남편이 서로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지?
"아마 magic wand, 그러니까 요술봉을 만들어 달라고 한 것 같아요. 종이를 말아서 마치 마법사의 요술봉처럼요! 그런데 단어를 몰라서 이렇게 표현한 거죠."
Teacher Becky가 설명을 이어갔다.
"이게 정말 중요한 발달 과정이에요. 모르는 단어를 포기하지 않고, 자기가 아는 단어로 설명하려고 시도하는 거. 'Make a magic'이라니, 얼마나 창의적이에요?"
남편이 옆에서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여전히 좀 어리둥절했지만, 선생님이 그렇게 긍정적으로 평가하니 기분은 좋았다.
"도움 요청도 정말 잘해요. 예전엔 뭔가 필요하면 그냥 가만히 있거나 울었는데, 이제는 'I need help' 'Can you help me?' 이런 표현을 자연스럽게 써요."
"그리고 엘리는 우리 반 최고의 Yard Kid예요!"
Teacher Becky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매일 아침 도착하자마자 'Outside? Can we go outside?'부터 물어요. 비가 와도, 추워도, 상관없이. 지난주에 비 온 날 있었죠? 다른 아이들은 다 실내에 있고 싶어 했는데, 엘리는 레인코트 입고 나가자고 했어요."
그래서 매일 옷이 그 꼴이었구나. 진흙 묻고, 풀 묻고, 모래 가득. 한국이었다면 '어머, 애가 왜 이렇게 더러워졌어요?'라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
"밖에서 뛰어노는 게 아이들 발달에 정말 중요해요. 대근육 발달은 물론이고, 자연 관찰, 과학적 호기심, 모든 게 야외 활동에서 시작되거든요."
남편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우리 딸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구나' 정도로 이해한 것 같다.
"최근엔 소근육 활동에도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특히 art 시간을 좋아해요. 붓을 잡는 법도 많이 좋아졌고, 가위질도 직선은 꽤 잘 자르더라고요."
Teacher Becky가 엘리의 작품 몇 개를 보여줬다. 알아볼 수 없는 형체들이었지만, 색깔은 과감했다. 온통 빨강, 파랑, 노랑.
"색감이 대담해요. 망설임 없이 붓을 움직이는 게 보여요."
"개선할 점도 있어요."
Teacher Becky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순간 긴장했다.
"간식 시간에 음식을 너무 천천히 먹어요. 다른 아이들이 다 먹고 놀 때, 엘리는 아직 반도 안 먹었을 때가 많아요."
아, 이건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밥 한 그릇 먹는데 한 시간. TV 안 보고도 한 시간.
"그리고 clean-up time에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놀 때는 열심히 노는데, 정리할 때는 슬그머니 사라지더라고요."
남편이 피식 웃었다. 집에서도 똑같다. 장난감 꺼낼 때는 번개같이 빠른데, 치우라고 하면 "I'm tired" "나 다리 아파" 온갖 핑계를 댄다.
"전반적으로 정말 잘하고 있어요. 7개월 만에 이 정도 적응한 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특히 언어적으로 완전히 다른 환경에서."
상담을 마치고 나왔다. 엘리는 여전히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누가 술래인지 모르겠지만 서로를 잡으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엘리를 아이스크림으로 꼬셔서 차에 태웠다.
차를 운전하며 남편이 말했다.
"Can you make a magic이라니, 생각도 못했네"
"그러게 마법봉을 영어로 몰라서 다른 방법으로 표현하다니... 아이들의 뇌는 어른들과 정말 다른가 봐. 엄청... 말랑말랑한 느낌이야."
"그러고 보면 DPNS 정말 특이한 것 같아. 한국이었으면 그냥 '잘 지내고 있습니다'나 '사교성이 좋아요' 정도로 끝났을 텐데."
"맞아. 관찰 기록이 저렇게 자세할 줄은 몰랐어. 소근육, 대근육, 사회성, "
"부모가 직접 참여해서 그런가? 선생님들이 더 신경 쓰는 것 같기도 하고."
"그것도 있겠지만... 애들을 정말 개별적으로 본다는 느낌이야. 획일적인 기준에 맞추려고 하지 않고."
신호등에 멈춰 섰다. 백미러로 보니 엘리가 벌써 잠들어 있었다. 오늘도 야외에서 실컷 뛰어놀았나 보다.
"근데 있잖아."
"응?"
"나는 사실 좀 감동받았어."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뭐가?"
"우리 엘리가... 영어도 서툴고, 동양인도 혼자인데, 그래도 잘 적응하고 있다는 거. 친구도 사귀고, 선생님한테 도움도 요청하고."
"..."
"한국이었으면 어땠을까? 이렇게 자유롭게 컸을까?"
나도 가끔 그 생각을 한다. 한국의 어린이집, 학원, 영어유치원. 그 속에서 엘리는 어떤 아이로 자랐을까.
"적어도 여기선 Yard Kid로 행복하잖아."
"그것도 최고의 Yard Kid."
우리는 다시 웃었다.
엘리가 잠든 후, Teacher Becky가 준 관찰 기록을 다시 펼쳐봤다.
'She is comfortable with her classmates.'
'Enjoys small group and solitary play.'
'Has a strong sense of fairness and cares for those she feels are not being treated fairly.'
'She has shown much improvement in communicating her wants and nees and asking for help.'
'Can manage self-help skills appropriate for her age.'
'Very good fine motor skills. Good large motor skills.'
...그리고 마지막 문장.
'Always shows an interest in learning new things.'
DPNS에서 보낸 7개월.
처음엔 왜 부모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Duty day, parents meeting, 펀드레이징, 끝없는 자원봉사. 그런데 이제 알 것 같다.
우리는 엘리를 '맡기는' 게 아니라 '함께 키우고' 있었다. Teacher Becky도, 다른 부모들도, 그리고 우리도. 이 공동체 안에서 엘리는 자라고 있었다.
"Can you make a magic for me?"
엘리의 서툰 영어가 자꾸 떠올랐다.
틀렸지만 아름다운, 부족하지만 용감한 그 문장처럼, 우리의 미국 생활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