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오라는 어린이집이 없다

세상의 모든 문이 닫혔을 때 이겨내는 법

by 유지니안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난 아침, 세상은 어제와 달라 보였다. 창밖의 햇살은 더 이상 나를 고립시키는 장벽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응원하는 축복처럼 느껴졌다. 나는 밤새 정리한 preschool 목록을 보물 지도처럼 펼쳐놓고, 가장 마음에 들었던 곳부터 차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를 받지 않는다. 너무 이른 시간이었나? 재차 전화를 걸고, 걸고 또 걸었다. 아 받았다. 심호흡을 한번 하고, 수십 번 연습한 대사를 읊조렸다.

"Hi, I’m calling to ask if my 2-year-old daughter can join your preschool program..."

(안녕하세요, 제2살 된 딸이 귀 유치원 프로그램에 지원할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 전화드렸어요)


내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들은 한결같이 상냥했다. 그 친절함에 잠시 안도했던 것도 잠시,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대답이 벽처럼 나를 가로막았다.

"Oh, I’m sorry, but we are not in the application period right now."

(죄송하지만, 지금은 지원 기간이 아니에요.)

"Our registration for the school year is already closed."

(학기 등록은 이미 마감되었습니다.)


나는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다.

"혹시 중간에 자리가 나면 연락을 받을 수 있을까요? 대기자 명단(waitlist)에라도 올려주실 수 없나요?"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절망적이었다.

“중간에 나오는 아이가 있어도, 정규 지원 기간이 아니면 새로 받지는 않아요.”

“대기자 명단이라는 건 없어요. 내년 5월 정규 모집 기간에 다시 지원해 주세요.”


한 군데, 두 군데… 전화를 돌릴수록 어젯밤의 희망은 빠르게 증발해 갔다. 새로운 아이를 받지 않는다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깊은 절망감 속에서 마지막 동아줄이라도 잡고자 우리의 사정을 구구절절하게 담아 email로 보냈다.

안녕하세요. 만 2세 딸아이를 등록할 수 있는지 문의드립니다. 정규 입학 지원 기간은 이미 마감되었으며, 현재 신입생을 받지 않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혹시 고려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귀 어린이집의 돌봄 프로그램과 육아 시스템을 알아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부디 저희 아이가 수혜를 받을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인 절차가 아닌 점,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귀 프로그램에 정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는 최근 데이비스로 이사했는데, 딸아이가 잘 적응하고 성장하며, 따뜻한 유아 교육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수 있다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거절의 답변이 돌아올 뿐이었다. 남편은 학교에서 새로운 지식을 쌓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나는 고작 아이 어린이집 하나 구하지 못해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서러움과 무력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엘리를 위해 TV를 틀어주는 것은 더 이상 선택지가 아닌, 유일한 도피처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러려고 그 모든 것을 뒤로하고 태평양을 건너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마음속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이집을 향한 모든 문들이 닫혔을 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단 한 곳뿐이었다. 바로 집 앞 놀이터, 바로 West manor park였다. West manor park는 아파트 단지와 단독주택 사이의 사각형 공간에 잔디밭과 농구코트, 테니스코트 및 놀이터를 집어넣어 놓은 아담한 공원인데, 우리가 살던 Portage Bay Apartment와 바로 붙어있을뿐더러 외부에서의 접근성이 좋지 않아 부랑자와 마약쟁이들이 없어 아이들이 안전하게 놀 수 있는 환경이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나와 우리 엘리를 거부했던 어린이집 중 하나인 Peregrine preschool도 위치해 있다. 나는 패잔병의 심정으로 엘리의 손을 잡고 놀이터로 향했다. 여우의 신포도처럼 Peregrine preschool 내 좁은 놀이터와 낡은 건물을 흉보면서. '저렇게 좁은 공간에서 애를 가둬 키웠다간 코로나19나 감기도 잘 걸리고 이도 옮고 아이의 정신 건강에도 안 좋을 거야.' 혹여 놀이터에서 엘리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만날까, 운이 좋다면 그 아이의 엄마와 친구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붙잡고 매일, 하루 종일 놀이터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제목 없음.png West Manor Park 전경

하지만 그곳은 또 다른 종류의 투명한 벽이 존재하는 세계였다. 유난히 백인 인구가 많은 West Davis에서, 동양인 엄마와 딸의 등장은 이방인의 출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미 그들만의 리그를 형성한 엄마들은 끼리끼리 모여 유창한 영어로 수다를 떨었고, 우리는 그 풍경에 속하지 못하는 섬처럼 겉돌았다. 어떤 이들은 신기한 동물을 쳐다보듯 우리를 훑어봤고, 어떤 이들은 애써 시선을 피했다.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넬 용기는 나지 않았다. 거절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내 입에서 나갈 어설픈 영어 문장에 대한 부끄러움이 내 발목을 무겁게 잡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미끄럼틀 아래서 하염없이 다른 아이들을 쳐다만 보고 있는 엘리의 뒷모습을 보았다. 친구를 사귀고 싶지만 다가가지 못하는 그 작은 어깨에서, 두려움 뒤에 숨어있는 나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순간, 가슴을 무언가가 세게 치는 듯한 깨달음이 있었다. '내가 부딪혀야 하는구나. 엄마인 내가 깨져야 아이가 설 수 있겠구나. 이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 딸의 세상을 열어주기 위한 일이다.' 그리고 놀이터에 들어서며 가장 먼저 마주치는 엄마에게 다가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어색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Hi, Hello!”


나는 그때 미처 알지 못했다. 목구멍에서 겨우 쥐어짜 낸 이 어색한 한마디의 인사가, 굳게 닫혔던 내 세계의 문을 열어줄 유일한 열쇠가 되리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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