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cramento Zoo / Monterey Bay Aquarium
미국에 도착한지 한 달, 우리 가족은 아직 모든 것이 낯설고 서툴렀다. 낯선 마트의 식료품들, 인도인 교수에게 인도식 영어로 수업을 들으며 고통받는 남편, 세상이 뒤바뀌어 혼란스러워하는 엘리까지, 우리는 현실과 괴리된 채 이리저리 헤매는 낯선 이, 이방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주말마저 가구없는 집 안에서 하염없이 TV만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데이비스는 북캘리(North California)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 동서남북으로 여행다니기에 정말 좋은 위치에 있다. 동쪽으로는 주도(Capital)인 Sacramento가 가까이 위치해 있고, 조금 가다보면 미국인들이 꼭 가고 싶은 휴양지인 Lake Tahoe가 있다. 남쪽으로는 거대한 절벽과 폭포로 유명한 Yosemite National Park를 갈 수 있으며, 서쪽으로는 그 이름도 유명한 San Francisco Bay Area가 위치해 있다. 북쪽으로는 다양한 유형의 화산을 볼 수 있는 Lassen Volcanic National Park도 있으니 위대한 자연경관을 온몸으로 느끼기에 최적의 위치에 있는 셈이다.
사실, 나와 남편 모두 집에 있는 것을 더 선호하는 집순이 집돌이들이다. 그리고 조금 불행하게 만드는 요인은, 우리 딸내미, 엘리는 매우 outgoing person이라는 점이다. 에너지가 넘치고, 집에 있으면 너무나 심심하고, 몸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우리 엘리는 무조건 밖에 나가서 온 몸의 에너지를 다 써야 집에 와서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자는 타입이었던 것이다. 그런 엘리를 위해, 그리고 가정의 평화를 위해 우리는 텅 빈 집을 뒤로 한 채 당일치기 여행을 다녔다.
#1. Sacramento Zoo
1월 15일 토요일, 오전에 간헐적으로 비가 오다가 갑자기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내리던 비로 인해 집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에게 황금같은 찬스. 데이비스 바로 옆에 위치한 새크라멘토로 향했다. 목적지는 새크라멘토 동물원. 동물원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우리를 맞이한 것은 화려한 분홍빛의 홍학 무리였다. 난생 처음 보는 광경에 엘리의 동그란 눈이 더욱 커졌다. 무어라 말을 하지는 못하고, 그저 작은 손가락으로 홍학을 가리키며 "아! 아!" 하는 소리만 연거푸 낼 뿐이었다. 그 모습에 나와 남편은 마주 보며 소리 없이 웃었다. 엘리의 첫 동물원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우리의 가장 큰 기대는 기린이었다. 책에서만 보던, 목이 아주 긴 동물. '엘리가 기린을 보고 놀라면 어떡하지?' 우리는 엘리를 안아 올려 "엘리야, 저기 기린이야!" 하고 외쳤지만, 그저 빤히 쳐다볼 뿐, 생각보다 반응이 크지는 않았다. 정작 엘리는 기린이나 코끼리, 원숭이 같은 동물보다는 놀이터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아이의 얼굴에 가장 큰 웃음꽃이 핀 곳은 바로 알록달록한 회전목마 앞이었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기린에 앉아 손을 흔드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생각했다. 어른의 기대와 아이의 시선은 이토록 다르구나. 이 아이에게는 동물의 이름이나 생태보다, 그저 엄마 아빠와 함께 새로운 것을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시간 자체가 가장 큰 기쁨이겠구나.
오늘 이 글을 쓰기에 앞서 5살 엘리에게 사진을 보여주며 물어보았다. "혹시 새크라멘토 동물원에 갔었던 것, 기억 나니?" 엘리는 벌써 까맣게 잃어버리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 없었다. 아이의 작은 손을 잡고 낯선 공기를 마시며 함께 걸었던 그 시간, 아이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그 오후의 햇살. 그 모든 순간은 나와 남편의 마음에 고스란히 저장되었으니.
#2. Monterey Bay Aquarium
2월의 데이비스는 한동안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화창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예전에 학생으로 산호세에 왔을 때 동기들과 함께 갔었던 몬터레이가 생각이 났던 건. 몬터레이에 세계적 규모의 수족관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낸 나는 이야기했다. "이번 주말엔 바다 보러 갈까?"
2월 19일 토요일, 간단하게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 몇 조각을 챙긴 채 부푼 기대를 싣고 몬터레이로 향했다. 데이비스의 끝없는 평야를 벗어나 서쪽으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설렜다. 하지만 그 설렘도 잠시, 산호세(San Jose) 인근을 지날 무렵부터 길은 주차장으로 변해버렸다. 평일의 한적한 도로만 생각했던 것은 우리의 착각이었다. 주말을 맞아 바다로 향하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두 시간이면 닿을 거리는 세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뒷좌석의 엘리는 카시트가 답답한지 한창 칭얼거리다 결국 잠들어버렸고, 아침만 해도 설레게 했던 캘리포니아의 햇살은 언제부터인가 짜증나게 쨍쨍한 햇빛으로 변해갔다. 그나마 챙겨간 샌드위치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점심을 쫄딱 굶어야 했을 것이다.
마침내 몬터레이에 도착해 차에서 내렸을 때, 서늘하면서도 짭조름한 바다 내음이 우리를 맞았다. 그 순간, 길 위에서의 피로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우리나라 바다와는 다르게 비린내가 없다. 태평양으로부터 불어오는 깨끗한 바람, 북태평양에서부터 내려오는 차가운 바닷물, 그리고 자연환경을 최대한 보존하려는 캘리포니아의 노력까지 깃든 결과일 것이다.
샌드위치만 먹은 탓에 금새 배가 고파진 우리는 우선 수족관 2층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서 리조또와 햄버거를 시켰다. 특히 오랜 운전으로 힘들어하던 남편은 햄버거 하나를 뚝딱 해치우고 살 것 같다며 배를 두드렸다. 나는 엘리와 같이 먹기 위해 리조또를 시켰는데, 정작 엘리는 리조또보다 햄버거에 딸려나온 감자튀김을 더 좋아했다.
몬터레이 수족관은 명성 그대로였다. 거대한 수조 속을 유유히 헤엄치는 상어와 가오리, 형형색색의 물고기 떼가 눈앞에 펼쳐지자 엘리는 차에서 겪었던 지루함을 완벽히 잊은 듯했다. 아이는 수조에 작은 손을 찰싹 붙이고는 "물꼬! 물꼬!"를 외치며 발을 동동 굴렀다. 특히 수천 마리의 정어리가 은빛 회오리를 일으키며 헤엄치는 '오픈 씨(Open Sea)' 전시관 앞에서는 넋을 잃고 한참을 서 있었다. 아이의 눈에 비친 파란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이곳에 오기 위해 길 위에서 보냈던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해 질 무렵, 우리는 아쿠아리움 근처 '부바 검프(Bubba Gump)'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를 테마로 한 식당은 관광객들로 북적였고, 미리 예약하지 않은 우리는 자리가 날 때까지 꽤 오랜 시간동안 밖에서 기다려야만 했다. 해가 저물고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꽤 쌀쌀한 날씨로 변해갔다.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다가 지쳐, 그냥 다른 데서 햄버거나 먹을까 고민하던 그 때,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요!" 하며 뛰어가 안으로 들어가니, 선술집같은 분위기가 펼쳐졌다. 늦은 시간에 다시 데이비스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배를 든든하게 채우고자 Gumbo(루이지애나 전통음식, 카레처럼 생겼다), 새우 파스타, 그리고 Forrest’s Seafood Feast (fish and chips와 새우튀김이 각종 소스와 함께 나온다)를 시켰다.
미국의 많은 캐주얼 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아이를 동반한 가족 손님을 위한 특별한 서비스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아이들이 지루해하지 않도록, 그림을 그리거나 미로 찾기, 퀴즈 등을 할 수 있는 종이 플레이스매트(placemat)와 몇 가지 색의 크레용(Crayon)을 제공하곤 한다. 이는 아이들을 위한 배려일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얌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함으로써 부모에게는 편안한 식사 시간을, 다른 손님들에게는 조용한 분위기를 보장해주는 효과적인 영업 전략이며, '가족 친화적인(family-friendly)' 식당이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고 한다.
다시 두 시간이 넘는 밤길을 달려 데이비스의 익숙한 우리 집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왕복 여섯 시간이 넘는 길을 달려, 몇 시간의 짧은 바다를 만났다. 어찌 보면 비효율적인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엘리의 마음에 남은 거대한 수조의 푸른빛과, 우리 가족이 함께 쌓은 몬터레이 바닷가의 추억.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하루였다. 낯선 땅에서의 생활이란, 어쩌면 이렇게 부지런히 우리만의 시간들을 쌓아가는 과정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또 하나의 캘리포니아의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