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터블 세탁기 대참사
공용 세탁실이 너무 짜증 나서 우리는 묘수를 생각해 냈다. 아마존에서 파는 포터블 세탁기. Black & Decker에서 만든 거였는데, 크기도 작고 가격도 200달러 정도로 저렴했다. 엘리 옷이라도 편하게 빨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바로 주문했다. 인터넷 현자의 격언이 떠올랐다. '허락보다 용서가 쉽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이 주문 소식을 듣고 길길이 날뛰었다. 하필 남편의 첫 학기 수업 중에 불법행위(Torts)와 계약법(Contracts)이 있어서였을까. 월세계약서를 근거 삼아 쓸데없는 지식을 뽐냈다.
"여기에 세탁기는 설치하지 말라고 되어있어. 이거 잘못 걸리면 집에서 나가라고 할 수도 있는 거라고."
"내 친구는 세탁기 쓰는데 문제없대. 안 걸리면 되잖아. 그리고 그렇게 공자왈맹자왈 할 거면 해결책을 내보던가! 빨래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엘리는 맨날 나갔다 오면 온몸이 흙투성이야. 여기는 한국이 아니라고. 놀이터에 우레탄 대신 우드칩이 깔려있고, 애들은 풀밭과 흙밭에서 뛰어놀아. 이런데 난 집에 세탁기도 없고!"
미국의 많은 아파트, 특히 오래된 건물들은 월세계약서(lease agreement)에 'No washing machines in unit' 조항을 포함한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누수 위험: 특히 2층 이상에서 누수 시 아래층에 심각한 피해 발생
- 구조적 문제: 오래된 나무 구조 건물은 습기에 취약하며, 반복적인 누수는 구조적 손상 초래
- 배관 문제: 아파트 배관이 세탁기의 대량 배수를 감당하도록 설계되지 않음
- 보험 문제: 무단 설치로 인한 모든 손해는 세입자가 배상해야 하며, 퇴거(eviction) 사유가 됨
특히 캘리포니아의 경우, 세입자 보호법이 강하지만 월세계약서 위반으로 인한 재산 피해는 예외다. 세입자는 본인뿐 아니라 타 세입자의 피해까지 모두 배상해야 한다.
학교에서 공부하느라 집안일에 소홀한 남편은 미안한지 결국 내 의견을 따라주었다. 그렇게 아마존에서 Black & Decker 세탁기가 오는 날. 남편이 공대 출신이라고 했던가? 자신만만하게 설치를 시작했다. 부엌 싱크대 옆에 놓고, 수도꼭지에서 호스 연결하고, 배수는 싱크대로 빠지게 설치했다. 처음엔 잘 돌아갔다. '아, 이게 바로 문명의 이기구나. 드디어 공용 세탁실에서 해방이다!' 그렇게 좋아했는데... 일주일도 안 돼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날 나는 엘리랑 낮잠을 자고 있었다. 갑자기 쿵쿵쿵! 문 두드리는 소리에 깼다. 뭐 이렇게 급하게 두드리나 싶어서 문을 열었더니 아파트 매니저가 서 있었다.
"1층에 물이 샌다는데요!"
헐. 부엌으로 뛰어가 보니 배수 호스가 싱크대에서 빠져서 바닥이 물바다였다. 세탁기는 신나게 물을 뿜어대고 있었다. 1층으로 내려가 보니, 부엌 천장에서 물이 줄줄 새고 있었고, 전등은 떨어져 산산이 깨져 있었다. 매니저가 딱 잘라 말했다.
"아파트에 세탁기 설치는 규칙 위반이에요. 이 건물 나무로 지어져서 절대 안 됩니다."
하필 남편은 밖에 나가 있었다. 전화도 안 받고. 아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었겠지. 나는 세탁기가 돌아가고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더더욱 당황했다. 알고 보니 남편이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가면서 엘리 옷을 세탁기에 돌려놓고 나갔던 것이다. 나와 엘리가 잠에서 깨지 않게 조용히.
그 포터블 세탁기는 바로 환불해버렸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공용 세탁실로 돌아갔다. 이번엔 진짜 체념하면서. 당연하지만 수리비도 우리가 다 물어야 했다. 매니저는 구조 진단까지 받아야 한다면서 전문가까지 불렀다. 다행히 구조에는 문제없었지만, 그 비용도 우리가 냈다.
며칠 후 날아온 청구서. 3,000달러가 넘었다. 200달러 세탁기가 3,000달러가 된 거다. 진짜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미국 아파트, 특히 오래된 나무 건물에서는 함부로 뭘 설치하면 안 된다는 걸 뼈저리게 배운 사건이었다. 그나마 퇴거조치 되지 않은 건 아마도 5살 아이 엘리 때문이 아니었을까.
여담으로, 그날 이후로 누가 문만 두드려도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더 이상 거리낄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안한 마음. '또 뭐야?' '또 무슨 일이야?' 택배 아저씨가 와도 놀라고, 친구가 와도 놀라고. 갑작스러운 노크 소리가 그렇게 무서워진 거다. 지금도 누가 문 두드리면 가끔씩 그때 그 순간이 떠오른다. 매니저의 다급한 얼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