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사한 차별과 비굴한 생존 사이
모로베이의 끔찍한 멀미에서 겨우 회복한 저녁. 30분 거리의 산 루이스 오비스포는 Cal Poly 대학이 있는 활기찬 도시였다.
"오늘은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먹자."
남편이 먼저 제안했다. 평소 같으면 "비싸잖아"라고 말렸을 텐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멀미로 고생한 우리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무엇보다 여행 내내 컵라면과 샌드위치만 먹었더니 속을 달래줄 음식이 간절했다.
Novo Restaurant. 개울가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 앉으니 마음이 편안해졌다. 메뉴판을 보며 가격을 계산하는 버릇은 여전했지만, 오늘만큼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 159달러를 바다에 버렸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먹고 힘내자.'
치킨 그린커리와 관자 요리. 정말 맛있었다. 한 입 먹을 때마다 몸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엘리도 처음 먹어보는 관자의 부드러움에 "물고기?"라며 신기해했다.
그런데 계산서를 받는 순간, 현실이 확 밀려왔다. 메뉴 3개에 팁까지 100달러.
'아, 이 돈이면 코스트코에서 일주일치 장을...'
하지만 남편이 내 손을 잡았다.
"괜찮아. 우리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먹은 거잖아. 가끔은 이래도 돼."
그 말에 조금 위로가 됐다. 맞다. 우리는 여행 중이고, 적어도 오늘은 멀미로 죽을 뻔한 우리를 위한 보상이 필요했다.
다음날 피스모 비치에 들러 유명한 클램 차우더를 먹고, 계속 남쪽으로 1시간 반. 드디어 '아메리칸 리비에라'라 불리는 산타바바라에 도착했다. 붉은 기와지붕의 스페인풍 건물들이 인상적이었다.
항구의 Brophy Bros. 요트들이 정박한 마리나가 내려다보이는 2층 테라스는 전망이 완벽했다. 그런데 음식을 기다리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주변 테이블에는 모두 빵 바구니가 놓여있는데 우리 테이블만 비어있었다.
"Excuse me, could we have some bread?"
"You have to ask for it."
서버의 대답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다른 백인 테이블들은 모두 빵을 달라고 요청했단 말인가? 손님이 없는 테이블에도 빵이 놓여있는데?
미국에서 아시아인으로 겪는 차별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노골적이지 않다. 증명하기도 어렵다. 하지만 왜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규칙인지, 왜 다른 테이블에는 자동으로 제공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그 작은 일이 저녁 내내 마음에 걸렸다. 싱싱한 굴의 바다 향도 그 찝찝함을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했다.
산타바바라에서 LA까지는 불과 2시간. 하지만 들어서는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끝없는 차량 행렬, 복잡한 프리웨이. 데이비스의 한적함에 익숙해진 우리에게는 충격이었다.
LACMA 주차비 16달러, 게티 박물관 20달러. 무료 전시라지만 주차비만으로도 부담스러웠다. 다저스 경기는 보고 싶었지만 티켓 가격을 확인하고는 아예 포기했다.
"엄마, 저 사람들 왜 길에서 자?"
할리우드 거리의 노숙자들을 보며 엘리가 물었다. 뭐라 답해야 할지 몰랐다. 화려한 도시의 이면. 창문을 열면 풍기는 대마 냄새에 차를 세울 엄두도 나지 않았다.
그나마 위안이 된 건 한인타운의 수원갈비였다.
"우리 한국 음식 먹을까?"
남편의 제안에 가슴이 뛰었다. 5개월 만의 제대로 된 한식당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걱정도 밀려왔다. LA 한인타운 물가는 악명이 높았다.
'그래도... 여행 왔는데 한 번쯤은.'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완벽한 한국이었다. 숯불 냄새, 지글거리는 소리, 정갈한 반찬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메뉴판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갈비는 1인분에 45달러. 하지만 엘리가 "고기!"를 외치며 좋아하는 모습에 결국 3인분을 시켰다. 상추쌈을 입에 넣는 순간, 정말 한국에 온 것 같았다. 남편도 "역시 고기는 숯불이지"라며 연신 구워댔다. 된장찌개의 구수한 맛, 시원한 냉면까지. 이 순간만큼은 돈 생각을 잊고 싶었다.
"여기 고기 더 먹고 싶어!"
평소 고기를 잘 안 먹는 엘리도 연신 손이 갔다. 그 모습에 뿌듯하면서도 불안했다.
계산서가 나왔다. 팁 포함 280달러.
'아... 이건 좀...'
밖으로 나오며 남편과 눈이 마주쳤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맛있었지만, 다시는 올 수 없는 곳.
"그래도 엘리가 너무 잘 먹어서 다행이야."
"응. 오랜만에 정말 배부르게 먹었네."
서로를 위로하며 주차장을 나왔다. 타향에서 느낀 고향의 맛은 달콤했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앞으로 한동안 외식하지 말아야지'하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리피스 천문대도 가고 싶었지만, 오후 5시 15분 전에 와야 입장 가능하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디즈니랜드는 더 큰 문제였다. 사실 나는 디즈니를 정말 좋아한다. 30대가 넘었지만 여전히 디즈니 프린세스를 보면 가슴이 뛴다. 호텔에서 남편과 계산기를 두드렸다. 성인 1인당 124달러. 엘리는 3세 이하 무료라고 해도 우리 부부 것만 248달러. 주차비 30달러까지 하면 거의 300달러.
"여보, 가고 싶어?"
남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내 표정에서 아쉬움이 다 드러났나보다.
"사실... 정말 가고 싶어. 어릴 때부터 꿈이었거든."
한참을 고민했다. 이미 여행 예산은 초과했지만, 언제 또 LA에 오겠나. 하지만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순간 현실로 돌아왔다. 이 돈이면 한 달 식비다.
"다음에 가자. 엘리가 더 크면 더 재밌게 놀 수 있을 거야."
내가 먼저 포기를 선언했다. 남편이 내 손을 꼭 잡았다.
"미안해. 내가 돈을 더 많이 벌었으면..."
"무슨 소리야. 우리 잘하고 있잖아."
서로를 위로했지만, 마음 한구석은 씁쓸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우리에게는 사치가 되는 현실.
"대신 돌아오면서는 디즈니랜드 근처 숙소를 잡아서 폭죽이라도 보자."
소박한 위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