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번외] 바람이 불어도 우리는 함께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기저귀 해방

by 유지니안

데이비스의 봄바람은 거셌다. Wind Advisory가 뜨면 나무들이 부러질 정도로 센 바람이 부는데,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아침부터 "꾸미틀 가자! 페이지 만나자!"를 외치던 엘리는 창밖의 나무가 휘청거리는 걸 보고도 이해하지 못했다.

"Let's raincheck!"

페이지 엄마, 제시에게서 문자가 왔다. 영어 교과서에서만 보던 표현을 실제로 쓰는 걸 보니 신기했다. 비가 와서가 아니라 바람 때문에 연기하는데도 raincheck라니.


엘리가 실망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요즘 엘리에게 페이지는 특별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단순한 놀이 친구를 넘어서, 엘리가 무언가를 배우고 따라하고 싶어하는 롤모델 같은 존재랄까.

며칠 전 페이지네 집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페이지가 갑자기 "I need to go potty!"라고 외치더니 혼자서 화장실로 뛰어가는 걸 본 엘리의 눈이 동그래졌던 것. 만 3살인 페이지는 이미 기저귀를 뗀 지 오래였다. 5살 오빠가 있어서 더 일찍 뗐다고 제시가 설명해줬다.

"엘리도 할 수 있어?" 페이지가 자랑스럽게 물었을 때, 엘리는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사실 기저귀 문제로 나도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놀이터에서 만난 엄마들이 "Oh, she's still in diapers?"라고 물을 때마다 압박감이 느껴졌다. 한국에서는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라는 분위기였는데, 여기는 달랐다. 특히 대부분의 preschool이 'potty trained'된 아이들만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욱 조급해졌다.

그날 이후 페이지가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화장실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엘리도 따라하고 싶어했다. 제시가 알려준 '스티커 차트' 방법도 시작했다. 화장실에 성공할 때마다 반짝이는 별 스티커를 붙여주는 단순한 방법이었지만, 엘리는 그 스티커를 모으는 데 진심이었다.


바람 소리가 창문을 두드리는 가운데, 전화벨이 울렸다. La Rue Child Care Center였다. 원래는 정규 지원기간에만 받아주는데, 이번에 자리가 나서 특별히 받아주겠다는 것이다. 그토록 기다리던 소식이었지만 마음이 복잡했다. 엘리가 아직 기저귀를 완전히 떼지 못했고, 무엇보다 영어도 서툴고 낯가림이 심한 아이가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됐다.

"고민이 많구나."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는 나를 본 남편이 물었다. 사정을 설명하자 남편도 고민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시한테 한번 물어봐. 페이지는 어디 다니는지."

그래, 제시라면 좋은 조언을 해줄 것이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DPNS 알아? Davis Parent Nursery School이야. 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곳인데, 페이지도 거기 다녀."

1949년부터 시작된 협동조합 방식의 유치원이라고 했다. 부모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보조교사로 참여하고, 그만큼 학비도 저렴하다고. 무엇보다 페이지와 함께 다닐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근데 거기도 potty trained 되어야 해?"

"응, 하지만 좀 더 유연해. 그리고 엘리 요즘 많이 늘었잖아!"

맞았다. 어제는 처음으로 엘리가 "엄마! 나 쉬 마려워!"라고 말하고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성공했다. "I did it! I'm a big girl like 페이지!" 영어와 한국어가 섞인 외침에 온 가족이 박수를 쳤던 기억.


창밖의 바람은 여전히 거셌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며칠 전 설날에 제시가 보낸 문자가 떠올랐다.

"Happy Lunar New Year! Hope you and your family have a wonderful celebration! "

머나먼 타국에서 한국 명절을 기억하고 챙겨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아무런 편견 없이 우리를 대해주는 진정한 이웃을 찾은 기분이었다.

페이지네 가족은 애들을 돌보는 데 도움을 받고자 LA에서 시댁 식구들이 사는 데이비스로 오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시는 남편의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삼촌, 사촌까지 모두 모여서 살고 있는, 하지만 친정 식구들은 없는 데이비스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그런 제시를 보면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편으로는 부러웠다. 나도 양가 부모님의 도움을 받으면서 엘리를 키우고 싶었으니까. 가끔 엘리 없는 나만의, 그리고 남편과 단 둘만의 시간이 필요하니까.


"엄마, 바람 언제 그쳐?"

생각에 잠겨있던 나를 엘리가 잡아당겼다. 이제는 '빅걸 팬티'를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는 우리 딸. 비록 밤에는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방수 패드를 깔아두지만.

"내일 오후면 괜찮아질 거야. 그럼 페이지 만나러 가자."

"약속?"

"약속."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하는 엘리를 보니 웃음이 났다. 기저귀를 뗀 '빅걸'이 되었지만 여전히 엄마의 약속이 필요한 작은 아이.

바람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거센 바람도 언젠가는 잦아들 것이고, 그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함께 성장해나갈 것이라고. 낯선 땅에서 만난 이웃들, 아이의 성장을 함께 기뻐해주고 타국의 명절까지 챙겨주는 사람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고.


다시 제시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럼 도서관에서 만날까? 애들이 놀 수 있는 공간도 있고, 따뜻하니까!"

맞다, 도서관! Davis 시립 도서관의 어린이 섹션은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을 만큼 넓고, 장난감도 많았다. 무엇보다 조용히 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적어서 좋았다.

"좋은 생각이야! 엘리가 페이지한테 자랑할 게 있대. 오늘 혼자서 화장실 다녀왔거든!"

한 시간 후, 우리는 도서관에서 만났다. 밖의 거센 바람과는 달리 도서관 안은 평화로웠다. 어린이 섹션의 카펫 위에서 엘리와 페이지는 블록을 쌓으며 놀기 시작했다.

"엘리! You're a big girl now!"

페이지가 엘리를 안아주었고, 엘리는 수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시와 나는 아이들을 지켜보며 조용히 이야기를 나눴다. DPNS에 대해서도,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가끔 사서가 지나가며 미소를 지어주었고, 다른 가족들도 책을 읽거나 조용히 놀이를 하고 있었다.

"여기 정말 좋다. 바람이 불 때마다 와야겠어."

제시가 말했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놀이터만큼 신나지는 않지만, 이렇게 따뜻하고 안전한 공간에서 아이들이 함께 놀 수 있다는 게 감사했다.


밤이 되어 엘리를 재우면서 속삭였다.

"오늘도 잘했어. 내일은 바람이 그치면 페이지랑 놀이터에서 실컷 놀자."

"엄마, 나 이제 기저귀 안 해도 되지?"

"그럼, 우리 엘리는 이제 진짜 언니가 됐으니까."

엘리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았다. 내일은 분명 바람이 잦아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놀이터에서 만날 것이다. 하지만 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도서관이 있고, 무엇보다 함께할 친구들이 있으니까.

페이지와 엘리, 제시와 나. 이 작은 도시 데이비스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 바람이 불어도, 비가 와도, 우리는 언제나 함께할 방법을 찾을 것이다. 그것이 진짜 이웃이고, 진짜 친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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