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신차보다 비싼 중고차

자동차가 없으면 아무 데도 못 가는 나라

by 유지니안

RAV4.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생소한 이름일 테다. RAV4는 'TOYOTA'에서 만든 중형 SUV로, 미국에서는 가장 잘 팔리는 차종 중에 하나이다. 우리가 이 차를 고른 이유는 정말 간단하다. 되팔 때 가장 잘 받을 수 있는 차라서. 그리고 Hybrid로 연료비까지 아낄 수 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혹독한 겨울이었다. 우리나라는 어느 정도 선방했지만, 미국에서는 코로나19가 한창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물류 대란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점차 본격화됨에 따라 유가는 물론 각종 생필품까지 가격이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새 차에 대한 로망이 없던 우리는 무조건 중고로 값싸게 사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미국생활에 들어갈 예산을 수립해 두었다. 하지만 전화를 아무리 돌려봐도 중고를 판다는 딜러샵이 없다. 오히려 used car가 있다면 자신들에게 팔아달라, 상태에 따라 신차 가격만큼 쳐줄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건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뿔싸. 하필 미국 시장에서 중고차가 사라진 시점에 오고 말았던 것이다. 왜 하필 우리가 왔을 때 이런 일이 발생하는지...


상황을 알아보니 이랬다. 코로나19로 인한 물류 대란과, 주요 자동차부품 공장들의 잇따른 폐쇄로 인해 신차 수급에 문제가 발생했고, 코로나19 초기에 국가에서 여행을 통제하자 렌터카 업체들이 중고차를 대량으로 시장에 팔아버렸는데(기억나는지 모르겠지만 이때 Hertz가 파산했었다), 이후 여행이 재개되자 렌터카 업체들이 영업을 위해 급하게 중고차를 매입하면서 시장에 큰 충격을 준 것이다. 이때만큼 실존적 위협을 느꼈던 때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이향만리 미국에 떨어져 2년 넘게 생활해야 하는데... 자동차가 없다? 당장 장은 어떻게 볼 것인가. 렌터카를 계속 사용한다? 몇 달만 타면 그 돈으로 아마 새 차를 살 수도 있을 테다. 그때부터 나와 남편은 데이비스 인근의 모든 딜러샵에 연락을 돌리기 시작했다. RAV4 Hybrid? 차종을 결정해 둔 건 정말 사치에 가까웠다. 현대, 도요타, 혼다, 포드 등등... 신차 역시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고, 최소한 한 달 이상을 대기해야 하며, 무엇보다 mark-up을 무지막지하게 불러댔다. 특히 현대는 투싼에 mark-up으로 5천 달러를 더 불렀다. 그때, 남편이 환희에 가득 찬 목소리로 상대방과 통화를 끝냈다.

"여보! Elk grove에 있는 Toyota 매장에서 mark-up 없이 RAV4 Hybrid를 팔아주겠대!"

자동차 가격표를 보면 MSRP, market adjustment, OTD price 등 용어들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그리고 딜러에게 물어봐야 할 가격은 바로 "OTD price"다.
- MSRP (Manufacturer’s Suggested Retail Price) : 제조사 권장 소비자 가격. 자동차 제조사가 정한 기준 가격으로, 딜러에게 이 가격으로 판매하라고 권장하는 금액
- market adjustment : 수요-공급 불균형에 따라 MSRP에 추가 또는 할인되는 금액
- OTD (Out-the-Door) price : 세금, 수수료, 딜러 요금 등 포함한 최종 가격

한편, 자동차를 사려면 일반적으로 연말에 사는 게 좋다. 제조사 인센티브 및 재고 정리 세일이 많아 할인율이 높기 때문이다. 가장 수요가 많아 자동차 가격이 비싼 시기는 바로 신학기 시즌(8~10월).


MSRP에 세금을 더해 OTD price가 39,615.27 달러.


다음날 바로 데이비스에서 약 1시간 정도 떨어진 Elk grove로 가보니, 일본에서 출하되어 배로 싣고 오고 있어 약 1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mark-up도 없고, 우리가 원래 사고 싶었던 RAV4 Hybrid잖아!' 1달 동안 렌터카를 더 타면 되는 거였다. 이미 우리는 마음속 결정이 끝났고, 그 자리에서 바로 카드로 전액 결제해 버렸다. 우리나라처럼 미국도 카드 수수료가 있어서 카드 결제를 안 받아주는 경우도 많다고 들었는데 카드를 받아줘서 다행이었다.

2022년 1월 18일 저녁에 차를 받을 수 있었다. 야호!


12월 12일에 미국 땅에 도착해서 12월 21일까지 약 10일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는 생존을 위해 몸부림쳤다. 크리스마스 연휴라는 D-day를 코앞에 두고 우리가 정착할 집, 우리의 발과 다리가 되어 줄 자동차, 그리고 우리의 신분을 증명해 주는 운전면허까지. 아직 호텔 생활을 청산하지 못했고, 렌터카를 타고 다니며, 우리의 신분을 증명할 여권을 항상 가방에 가지고 다녀야 했지만 이제야 온통 긴장했던 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그런 우리를 위해, 그리고 바쁜 일정을 같이 소화해 준 만 2살 아이를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특별한 휴식이 필요했다. 무엇보다 크리스마스에 미국에서 호텔에만 있기에는 우리의 마음이 너무 뜨겁지 않은가! 모든 일정을 소화한 우리는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아 조식 빵과 커피를 바리바리 싸들고 샌프란시스코로 향했다.


그렇게 세 가족이 함께한 샌프란시스코 여행. 도시 곳곳에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가득했고, 처음 보는 미국의 크리스마스 장식에 아이도, 우리도 눈을 반짝였다. 유니온 스퀘어 앞 메이시스 백화점에도 다양한 장식들과 화려한 물건들로 소비자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반짝이는 트리 장식, 예쁘게 진열된 아이 옷들, 향기로운 향초들까지... 입으로는 "예쁘다", "갖고 싶다"를 외치면서도 결국 지갑은 열지 못했다. 대신 눈으로 실컷 담았다. 솔직히 눈앞에서만 보고 못 사는 게 좀 억울했지만, 앞으로 어떤 나날들이 펼쳐질지 막연한 두려움에 도저히 손이 가지 않았다. '다음에 아울렛 가서 사지 뭐.' 아이가 갖고 싶다는 장난감 하나 못 사주고 나오는 우리 모습이 유난히 초라해 보였다. 그리고 다시는 이런 감정이 들지 않도록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마저 가슴속에 새기게 되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거리 곳곳에서 만난 부랑자들이었다. 길 한복판에 자리를 깔고 누워 있는 사람들, 장바구니에 온갖 살림을 싣고 이동하는 사람들,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다가오는 사람들... 미국의 화려한 도시 이미지 속에 이런 그림자가 존재한다는 게 낯설었다. 당시에는 두려운 마음에 말을 아꼈지만,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자연스럽게 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샌프란시스코가 부랑자의 도시가 되었다더니 정말이었어."

"15년 전에 내가 왔을 때는 진짜 반짝반짝하고 깨끗한 도시 었는데, 우리나라 서울보다 훨씬 멋있고 웅장한 도시 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되었지?"

"차라리 데이비스에 오게 된 게 다행인 건가? 데이비스 시내에는 부랑자가 잘 안보이던데..."

"샌프란시스코 인근에 살았다면 부랑자와 마약쟁이들 때문에 엄청 불안했을 것 같아."


크리스마스이브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것은 골든게이트 브릿지에서의 풍경이었다. 샌프란시스코 시내가 보이는 골든게이트 브릿지 vista point에 도착하자 시원한 바람이 우리를 맞이했다(사실은 비바람이 불어서 약간 추웠던 것 같다). 그리고 우리를 맞이하듯이 샌프란시스코 시내를 배경으로 구름 사이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하늘이 뚫린 듯, 어둠 사이로 퍼지는 빛. 그 풍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미국 생활도 저 햇살 같았으면 좋겠다고. 때로는 구름처럼 답답하고, 어둡고, 안 보일 때도 있지만, 결국에는 빛이 우리를 향해 찾아오리라. 그렇게 우리의 미국 생활도 한 줄기 희망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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