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V, 제발 저에게 면허시험의 기회를 주세요
월세 계약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가는 길, 우리는 숨 가쁘게 돌아가는 일정 속에서 우리를 위한 작은 선물을 스스로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12월 12일에 미국에 떨어져, 크리스마스 연휴가 시작되기 전에 집을 구해야 하는 생존 문제가 가까스로 해결이 되어서였을까. 그날따라 호텔로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아침은 호텔 조식으로 때우고, 점심은 in-and-out burger, 저녁은 바리바리 싸들고 온 이민가방에 넣어온 컵라면과 컵밥으로 배를 채워왔다.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의식주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우리는 처음으로 제대로 된 '식당'에서 밥을 먹어보기로 했다.
조식이라고 해서 우리나라 호텔을 생각하지 말자. 보통 미국의 3성급 호텔은 기본적인 것들만 - 오트밀 죽, 에그 스크램블, 베이컨, 베이글, 토스트, 요거트, 커피, 주스, 우 그리고 멜론과 포도 - 제공된다. 운이 좋다면 와플기계가 있어 따뜻한 와플도 먹을 수 있다. 대부분 대량으로 주문해서 내놓는 인스턴트로, 요리사가 직접 해주는 서니사이드업이나 팬케이크는 기대하기 힘들다. (신선한 제품, 요리사가 갓 해주는 음식을 원하면 5성급 호텔로 가시라.)
캘리포니아 데이비스의 겨울 날씨는 사람을 축축 처지게 한다. 기온은 약 10도 정도로 우리나라에 비하면 높은 편이지만, 비가 계속 내려 이상하게 뼛 속까지 시린 느낌이 든다. 게다가 해가 빨리 져서, 저녁 6시만 되어도 벌써 어둑어둑하다. 이런 날씨면 으레 그렇듯이 따뜻한 국물이 생각나게 된다. 게다가 만 2살 아이도 같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한정되어 있고. 역시 우동이 제일 낫겠다 싶었다. 재빨리 google 지도에 udon을 검색해 보니 "Zen Toro Japanese Bistro"라는 음식점이 나왔다. 리뷰도 좋고 별점도 나쁘지 않았다. 재빨리 들어가 보니 세 테이블 정도가 차 있었다. 럭키! 갑자기 허기가 지고 군침이 싹 도는 게 맛집임이 틀림없다. 나를 위한 우동과, 남편을 위한 덴뿌라동을 시켰다. 아이는 나와 함께 우동을 먹으면 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음식점 주인분이 한국말을 하는 게 아닌가! 알고 보니 한인분께서 운영하시는 식당이었던 것이다. 데이비스에 온 것을 환영한다며 우리 아이를 위해 자그마한 덮밥도 서비스로 주셨다. 오랜만에 먹어보는 제대로 된 음식, 따뜻한 한국인의 정, 그리고 얕게 흐르는 차분한 음악까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미국에서, 그것도 소도시에서 자동차 없이 생활하는 것은 자살 행위와 같다. 만약 가족과 함께 거주한다면 더욱 그렇다. 그건 마치 비행기 없는 세계여행, 증기선 없는 대륙횡단 같은 어려움이다. 따라서 다음 미션 장소는 바로 DMV, 즉 차량관리국이다.
차를 구매하거나, 운전면허를 따야 한다면 DMV의 악명 높은 행정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차를 구매할 때 자동차보험을 들어야 하는데, 운전면허증이 없다면 곤란하다 (국제면허증으로도 가능하다고는 하는데, 보험료가 올라간다고 한다). 참고로 캘리포니아의 경우 국제면허증을 한국에서 발급받아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공식적으로는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 임시로 국제면허증으로 운전하더라도, 두 달 이상 미국 내에 거주하는 경우 미국에서 운전면허증을 발급받아야 한다. 특히 관광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면 원칙적으로는 10일 이내에 운전면허를 따야 한다. 운전면허증은 미국에서 신분증과 같이 사용될 수 있으므로, 항상 여권과 I-20를 들고 다닐 것이 아니라면 운전면허증을 발급받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 필기부터 도로주행까지 모두 통과해야만 운전면허를 딸 수 있다.
DMV에 예약 없이 방문했다면 최소한 1~2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요새는 인터넷으로 예약이 가능하니 꼭 예약을 하고 가자. 우리 가족은 예약하는 법을 몰라서 바로 쳐들어갔다가, 크리스마스 연휴로 인한 인력 부족에 외국에서 온 신입생들의 운전면허 및 차량등록 수요가 겹쳐서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운전면허를 신청하기 위해서는 1. 신청서, 2. 주소증명서류 2부(이게 가장 문제다), 3. 신분증, 4. I-20 (입학 허가서), I-94 (출입국증명) 등이 필요한데, 주소증명서류 때문에 무려 2번이나 퇴짜를 맞았다. 보통 주소증명서류로는 월세계약서(rental agreements), 대출증빙서류(mortgage bills), 공과금고지서(utility bills), 은행명세서(bank statements) 등이 가능하다.
처음 방문했을 때는 아직 집을 구하지 못한 상황이어서, 월세계약서, 대출증빙서류, 공과금고지서 등을 제출할 수 없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남편과 내 은행명세서 각각 1부씩 해서 2부를 제출하면 되겠지 하고 보무도 당당하게 DMV에 들어갔던 것이다. 당연하게도 운전면허를 따려는 당사자의 주소증명서류가 필요했기 때문에 필기시험 문턱에도 못 가보고 시간만 낭비한 채 호텔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Portage Bay apartment와 계약하자마자 월세계약서를 가지고 다시 DMV에 방문했다. 국제면허증이 원칙적으로 유효한 10일은 이미 지나가버렸고, 이제를 그저 최대한 빠르게 운전면허증을 받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1월 3일부터 남편의 학교에서 오리엔테이션을 시작하기 전에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퇴짜를 맞고 말았는데, 월세계약서에 나와 남편, 그리고 Leasing office의 서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당연하게도 계약서에는 서명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전자 서명이라고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leasing office와 구두로 계약 의사를 표시하고 office로부터 받은 월세계약서는 말 그래도 draft였을 뿐, office에서도 우리에 대한 신용 조사라던가, 신분 확인이라던가를 통해 지불 능력이 있는지 확인하는 process를 거친 후에야 최종 서명이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2021년이 지나기 전에 운전면허를 취득하려는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고, 결국 크리스마스가 끝나고 나서야 모든 증빙서류를 가지고 DMV 필기시험을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캘리포니아에서 필기시험만 합격한 사람은 운전할 때 반드시 '운전면허증이 있는 사람'이 옆좌석에 탑승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때문에 실기시험 합격 전까지는 마트에 가더라도 경찰차 소리에 마음 졸이면서 다녀야 했을 것이고, 실기시험을 보러 갈 때도 운전면허증을 가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내가 교환학생 때 운전면허를 따 놓지 않았다면 말이다. 다행히 운전면허가 있던 나는 시력검사와 함께 필기시험만 보는 것 만으로도 면허증을 갱신할 수 있었다.
외국인이 현지에서 살아남는 것은 이렇게도 어렵다. 미국인들이라면 가족이나 친구가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일들도 우리는 전전긍긍하며 이겨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점은, 기회가 왔을 때 무조건 도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교환학생 당시 '차도 없는데 굳이 미국 운전면허를 딸 필요가 있을까?'라고 생각해서 도전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해야만 했을 것이니 말이다.
남편이 DMV 필기시험을 합격하고 실기시험까지 예약했던 그날 밤. 남편은 환하게 이야기했다.
"이제 차를 구해보자! 어떤 차가 좋을까?"
우리는 미국에서 우리의 발이 되어 줄 차를 고르기 시작했다. '한국인이라면 제발 현대기아차 응원하자', '미국까지 왔는데 캐딜락 한 번 타봐야지', '캘리포니아에서 테슬라 못 참지' 등등... 하지만 우리가 결국 고른 건 바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