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할 게 너무 많다
미국은 나에게 있어 꿈과 희망, 그리고 행복이 가득할 것 같은 곳이었다. 17년 전 학생으로 갔다 온 샌프란시스코와 산호세는 완벽한 날씨, 깨끗한 도로, 고층의 마천루, 그리고 무엇보다도 낯선 이방인에게조차 친절했던 시민들까지. 내가 다시 해외로 나간다면 반드시 미국 캘리포니아로 가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그때의 추억들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15년 후, 남편은 나를 다시 캘리포니아로 이끌어줬다. 산호세에서 2시간 남짓 떨어진 "데이비스"로. 그것도 만 2살 아이와 함께 말이다. 많은 분들이 모르실, 그리고 나도 몰랐던 사실 하나는, "데이비스"는 사시사철 서늘한 bay area와는 다른, 여름 기온이 40도까지 올라가는 내륙 지역의 소도시라는 점이다.
짠내 나는 데이비스 적응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어떻게 미국에 가게 되었는지부터 설명하는 게 맞겠다. 운이 좋게도, 남편이 다니던 회사에서 고맙게도 미국 유학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MBA를 가고 싶어 하던 남편은 미국 TOP 5 대학에만 지원서를 제출했고, 모두 탈락하고 말았다. MBA 지원은 크게 3번 이루어지는데, 전년도 9~10월에 Round 1, 당해연도 1월에 Round 2, 3~4월에 Round 3이 바로 그것이다. 안타깝게도 남편은 Round 1과 2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고, 경쟁률이 치열한 Round 3에만 지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똑 떨어지고 말았다. 탑스쿨 MBA 외에 다른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던 남편은 부랴부랴 다른 길을 찾기 시작했고, 그런 남편에게 넌지시 "LLM"에 대해 알려주었다. 어찌나 고집불통이던지, LLM은 자기 적성하고 맞지 않는다면서 거부하던 그는 회사가 제공한 유학 기회가 없어지기 직전에서야 UC 데이비스 LLM에 지원하여 가까스로 입학할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아마 많은 아내들이 공감하겠지만, 남자들은 도통 설득되지 않는다, 실제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그해 8월, 합격 통지서를 받기까지, 옆에서 바라보기 괴로울 정도로 답답하고 가슴 졸이는 상황이었다. '어찌 저런 나이브한 마음가짐으로 회사를 다녀서 성과를 낸담.' 그래도 어찌어찌 합격은 했지만, 미국에 나가서 생활할 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 않았다. 남편은 이번이 첫 번째 해외 생활이어서 그런지 무책임할 정도로 신변 정리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남편 회사에서도 야속할 정도로 남편을 굴려댔다. 세상에 날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만 2살 아기는 코로나19로 인해 자꾸만 벗어대는 마스크를 씌우고 어린이집에 보내야 했다. 뇌가 청순한 남편을 대신해 출국 준비를 하나하나 해나가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돈 아닐까. 미국에서 급하게 사용할 달러를 환전해둬야 했다. 당장 미국에 들어가면 집도 차도 없어서 큰돈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최대한 환율 우대를 받고자 Sol 편한 환전을 이용했는데, 일일 환전한도가 있어 매일 조금씩 환전해 나갔던 경험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당시 환율은 1,110원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더 많이 환전해뒀어야 했다. (미국에 가서도 크게 후회했다) 그래도 미리부터 환전해 둔 덕분에 미국에서 자동차를 사고 집 월세계약금을 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달러를 조금씩 모았던 것은 아마도, 단순한 금융 거래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조금씩 사 모으는 의식과도 같았지 않았나 고백해 본다.
그다음으로는 이사가 가장 시급했다. 당시 코로나19로 인하여 세계 유수의 항구들이 셧다운 되고, 항만노동자들의 코로나19 감염이나 퇴직 등으로 인해 물류 이동에 어려움이 있었던 터다. 평소 같으면 한 달이면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는 한국발 이삿짐이 코로나19 시국 속에서 세 달 이상 걸린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최대한 빠르게 이사를 준비했고, 다행히 11월에 이삿짐을 싸서 미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침대부터 소파, 식탁까지 웬만한 물건들은 다 보내버렸는데, 혹시 미국에 나가기 전 이 글을 보는 독자분들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피가 큰 가구들을 다 같이 보내다 보니 비용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미국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더 고급스러운 가구들을 구매할 수 있다. 비용적으로 부담이 된다면 IKEA나 중고 구매 등을 통해 더욱 가성비 있게 장만할 수 있으므로, 비싼 돈 주고 한국에서 가구를 보내는 우를 범하지 말기를 바란다. 가구 외에 TV, 냉장고, 세탁기 등 전자제품의 경우 전압이 맞지 않아 당근마켓을 통해 저렴하게 내놓았다. 이 모든 걸 홀로 진행하게 해 준 남의 편... 남편에게 오늘도 등짝 한 대 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외로 속 썩였던 것은 기존에 살던 집을 내놓는 일이었다. 꽤 긴 기간 동안 집을 비우기 때문에, 전세를 놓거나 매도를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집을 청소하고, 식기세척기 위치에 장을 다시 짜 넣고... 하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전세로 계약하기로 했던 예비 세입자가 계약서를 작성하는 자리에서 파투를 내버린 것이다. 가계약 당시에는 제발 좀 전세 살게 해달라고 하더니, 부동산 시장이 차갑게 식어버리자 마음이 바뀐 것 같았다. 계약하기로 한 날짜는 우리가 출국하기 1주일 전이었는데, 전세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서울에서 왕복 5시간 거리의 지방에 왔다가야 만 했던 우리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결국 우리는 미국에서 생활하던 기간 내내 그 집을 비워만 둘 수밖에 없었고, '이럴 줄 알았으면 이삿짐을 보내지 말걸'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더욱더 속상한 점은, 상대방이 계약 체결을 거부했기 때문에 가계약금을 돌려주지 않았는데 예비 세입자 분들이 우리가 해외에 나가있다는 점을 악용하여 소송을 걸었다는 점이다. 다행히 평소 좋은 관계를 유지해 온 부동산 아저씨가 소식을 알려준 덕분에 소송 사실을 알 수 있었지만, 이미 소송 결과가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추완항소(추후 보완하는 항소. 송달 사실을 알지 못한 상태가 객관적으로 인정되어야 함)를 통해 이의를 제기할 수 있었지만, 해외에 나와 있는 상태에서 대응하는 게 쉽지 않기에 가계약금에 이자를 붙여 되돌려주는 선택을 했다. 해외에 오랫동안 나가계실 분들은 반드시 '소송거리'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게 좋겠다. 아울러, 전자소송포털(ecfs.scourt.go.kr)에 가입하여 전자송달을 신청해 두는 것이 안전할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만 2세 딸내미의 여권을 만들고 가족 모두의 비자를 발급받는 일이었다. 가족들을 이끌고 광화문에 위치한 주한미국대사관 쪽문으로 들어가면서, 인터넷에서 봤던 비자 발급이 거부된 사례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어떤 질문을 하게 될까... 어떻게 답변해야 하지...' 머릿속에서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 듬직하게 잡아주는 남편의 손길에 그간의 미움과 마음속 초조함이 함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다행히 남편과 나 모두 직장을 다니고 있고, 가족 단위로 출국하며, 귀국의사가 확실했기 때문에 별 탈 없이 면접을 잘 마칠 수 있었다.
학생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서류가 필요하다. 하나라도 부족하면 반려되니 주의하자.
< F-1 (학생 본인) 비자 >
1. DS-160 : 비자 신청서
2. SEVIS I-20 : 비이민 학생(F-1) 또는 동반 가족(F-2) 자격을 증명하는 공식 문서. 학교에서 발급
3. SEVIS I-901 : SEVIS 비용 납부 영수증
4. 여권, 비자용 사진(5x5cm), 비자신청수수료 납부 영수증, admission letter, 재정증빙서류 등
< F-2 (동반 가족) 비자 >
1. DS-160 : 비자 신청서 (F-2 신청자별로 각각 작성)
2. SEVIS I-20 : 동반가족용으로 학교에서 따로 발급받아야 함
3. F-1 관련 문서(여권, 비자, I-20) 사본
4. 가족관계증명서 (영문) 및 혼인관계증명서 (배우자), 출생증명서 (자녀)
5. 여권, 비자용 사진(5x5cm), 재정 증빙 서류(F-1의 재정이 F-2를 충분히 부양 가능함을 입증)
그 외에도 마음고생 몸 고생했던 수많은 준비 과정이 있었다.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데이비스 에어포터를 알아보고, Zillow를 통해 데이비스 아파트와 타운하우스, 싱글하우스 등을 알아보고, 현지에서 단기간 사용할 유심칩을 구매하고... 이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출국의 스타트라인에 선 기분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인천공항에 새벽같이 도착하여 코로나19 검사를 하고, KE23에 몸을 던지는 순간, 그 순간이 아마 경계를 넘어 미국으로 다이브 한 순간일 것이다... 앞으로의 고단함은 예상하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