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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미엘리 Mar 18. 2024

실패였나요? 실패가 아니었나요?


나는 새옹지마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행운이 불행이 되기도 하고 불행이 행운이 되기도 함을 이르는 말로 변수가 많다. 그래서 나쁜 일도 슬퍼할 일이 못 되고 행복도 기뻐할 것이 아님을 뜻한다. 물론 모든 일이 이렇다 할 수는 없지만 내가 원하는 일을 능동적으로 했을 때의 결과들에서 이런 재미난 경험을 나는 많이 한다.

인생을 걷는 발걸음이 수동적인 나에겐 그에 따른 실패 이야기도 딱히 없다. 어렴풋이 뒤돌아본 나의 지나온 길은 메말라 갈라져 있었고 이것이 길이었는지 하는 아쉬움에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다. 오랜 시간의 자학은 내가 어떤 유형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난 다음부터 나에게 조금씩 관대해졌고, 어디서 언제 날아 왔는지 나의 메마른 길에 어느새 잡초가 나기 시작한다.

이것이 과연 실패였나요? 실패가 아니었나요?

나에겐 정말 까다로운 남편이 있다. 연애를 길게 했더라면 이 남자랑 결혼까지 안 했을 텐데(남편도 나와 마찬가지 일 게다). 나는 결혼생활 내내 남편과 시댁 가족에게 참고, 희생하며 살았다는 피해 의식에 살았었다. 아무 생각 없이 다른 이의 말에 나의 모든 것을 담았고 힘들어 쩔쩔매던 지난 시절 그때의 내 모습이 못내 안타깝다. 지금 같은 성격으로 그때 살았으면 내가 하고 싶은 말도 하고, 내 속도 편하고 이렇게 아쉬워하지 않았을 터라는 생각도 든다(50세를 기점으로 나는 변했다). 지금의 내가 그때로 돌아가지도 못하거니와(한 번이면 족하다) 내가 그다지 지혜롭지 않은지라 지금과 같은 가족관계나 부부관계도 장담할 수 없다. 나에겐 힘든 과거였지만 시댁 가족은 나에게 고마워하고 나를 존중 해 준다. 요즘 내가 유별난 성격을 부려도 다른 식구들이 받아 주는 건 내 과거의 크레딧 덕분이 아닐까 싶다. 나의 변화에 아직도 적응을 못 하는 남편한텐 미안하지만 사는 게 우당탕 인 지금의 내가 너무 좋다.        
 
나에겐 아이들이 셋이 있다. 다들 장성해서 자기 몫을 해야 할 나이 들이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셋 다 대학을 중퇴하고 마땅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있다(아이들과 눈을 못 맞춘다. 나의 화와 걱정이 전달될까 봐).  하나같이 유별나게 잘 나가는 나의 주변인의 자식들을 보고 들으면서 아이들을 키우는 우리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 남편과 대화도 해 보고 싸우기도 많이 해 보았다. 가장 쉬운 답은 ‘너 닮아서 아이들이 저래!’라는 것이었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다리 밑에서 주워온 아이들도 아니고, 아이들의 생김새가 우리와 떡판 같이 닮았다고들 하니 빼도 박도 못한다. ‘세대가 달라서 그래’, ‘자라온 환경이 우리하고 달라서 그래'라고 이유를 내뱉어 보지만 ‘왜 내 아이들만?’ 하는 이유 없는 결론만 나온다. 허우대 멀쩡하고 어디 아프지 않으니 시간이 가면 뭔가는 하겠지(그 지나가는 시간을 아이들보다 내가 더 두려워하는 것 같다). 걱정은 말아야지(그나마 당사자들은 태평해 보이니 다행이다). 먼 뒤안길에 이런 긴 고뇌의 시간이 아이들에게나 나에게 또 다른 깨달음의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코끝이 찡해온다.

“애들아, 날씨도 꿀꿀한데 오랫만에 오뎅국이랑 떡볶이 만들어 먹자 ~~~”
“엄마, 너무 맵게 하지 마세요.”
“아니야. 매워야, 속이 뻥 뚫리고 맛나지!~~~”

Ps. 그렇다고 내가 힘들다하여 음식으로 아이들을 고문하는 건 절대 아님을 알아주길 바란다.

그림 이중섭 <가족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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