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물지 않은 상처
자명종이 울리 듯 그치지 않는 새 울음소리. 마치 어린아이가 떼를 쓰듯 아악~~ 아악~~ 거린다.
이런 새 울음소리는 처음 들어본다. 르완다 새는 다 저렇게 우나!
아직 긴 시간의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기지개를 켰다.
도심 곳곳의 숲에서 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고 있는 르완다의 아침을 본다.
5일 동안의 교육이 시작되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정이 빡빡했다. 코이카를 통해 부부가 함께 오는 경우도 매우 드물지만 이렇게 함께 교육을 받는 경우도 아주 드문 경우라고 한다. 그들에게 나는 작가로 소개되었고 르완다에 관해 집필을 하고 싶다고 말했더니 끝까지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랐다. 나는 유일하게 챙겨간 시집 한 권을 도서관에 기증했다.
마침 르완다 한국대사관건물 안에 코이카 사무실이 있어서 대사관을 방문하기에 좋았다. 대사님과 한 시간가량 르완다 발전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현재 르완다 교민의 수가 200명 정도라고 하며 앞으로 교민들이 자주 모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들겠노라고 했다. 일행은 사진 한 컷 찍고 교육을 받기 위해 다시 이동했다.
영어로 진행되는 강의는 알아들을 수 없는 부분들이 상당수라 나는 단어 몇 개에 의지해 대충 흐름을 파악했다. 그래도 큰 수확을 한 것처럼 기뻤다. 한 템포가 아닌 몇 템포 이상의 느린 이해와 웃음으로 들으면서도 남편 옆자리라 그런지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르완다의 역사에 대해서 관심 있게 들었는데 이 강의는 르완다에 오래 거주하고 있는 한국 선교사님이 해주셔서 더 이해가 빨리 되었다.
르완다는 아프리카 동쪽에 있는 바다가 없는 내륙 국가이다. 우리나라 경상도 정도의 면적을 가지고 있는 아주 작은 나라다. 서쪽으로는 콩고, 북쪽으로는 우간다, 남쪽으로는 부룬디, 동쪽으로는 킬리만자로 산이 있는 탄자니아가 있다. 수출입이 어렵다 보니 국민 대부분이 커피나 차 등 농업경제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르완다에서 생선요리는 아주 귀한 것이고 레스토랑에서도 아주 비싸다.
적도 부근에 있는 르완다는 아프리카에서 살기 좋은 곳으로 면적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다. 천 개의 언덕이 있다고 할 정도로 산이 많다. 평평한 길인가 하면 오르막길이고 또 내리막길을 걷는다. 걷다 보면 이쪽을 보아도 푸르고 저쪽을 보아도 푸르다. 집들이 온통 숲에 둘러싸여 있다. 교통 시설이 불편하다 보니 이곳 사람들은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닌다. 저녁 퇴근 무렵이 되면 승용차나, 오토바이 택시와 함께 도로 가장자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을 흔히 볼 수 있다.
언젠가 영화 '호텔 르완다'를 본 적이 있다. 르완다 대학살(Rwanda genocide) 사건에 관한 영화였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30년 전인 1994년, 벨기에 식민 지배를 받던 그때가 영화의 배경이다. 온전히 식민지국이 자신의 통치를 위해 부족의 분열을 야기한 것으로, 사람들을 키와 외모로 나누면서 부족 간의 증오심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코의 높이를 자로 재고 있는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는데 유럽인의 외모를 닮아 키가 크고 코가 높은 사람을 통치계급으로 삼아 우월감을 안겨주었던 것이 발단이 되었다. 약 100일 동안 80만 명 이상이 학살되었고 200만 명 이상이 주변국으로 건너가 피란 난민으로 전락했다. 이로 인해 르완다 전체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희생당한 사건이었다.
교육 기간 중에 우리는 키갈리 제노사이드 기념관 (kigali genocide memorial)을 방문했다. 국화 한 송이를 그들의 무덤에 놓고 잠깐 동안 목례를 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이 여전히 그때를 기억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르완다에서 "어느 부족이냐?"라고 묻는 것은 금기시되어 있다. 투치족, 후투족 같은 말조차 꺼내지 말아야 한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대학살 현장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어느 중년의 모습이었다. 당시 이웃에 의해 26번이나 칼에 찔렸다는 여인은 얼굴에 커다란 칼자국이 있고 얼굴 모양도 틀어졌다. 그 옆에 함께 사진을 찍은 한 남성은 실제로 여인을 칼로 두 번이나 찔렀다고 고백한 이웃이었다. 둘은 정말로 화해했다고 한다. 혼자 조카들을 키우고 있는 여인을 위해 남자는 좋은 집을 지어 주었고, 두 가정 간에 자녀의 혼인도 성사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보이지 않게 지금도 서로를 구별 짓는다고 한다. 학교에서도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다. 저들의 평온함 속에 여전히 자리하고 있는 상처가 언제쯤 아물 수 있을까! 길을 가다가 마주 오는 노인을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슬픔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