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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인의 숲 Jul 02. 2024

르완다에서 부는 바람 29화

벌써 추억이 된 고국에서의 한 달

마음속 어딘가에 그리움이란 저장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 그 사람은 행복하다. 무엇이 그립다는 것. 생각해 보면 그것이 있어 오늘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슬픔과 기쁨이 함께하는 비밀의 아지트. 내 마음의 저장고를 가득 채워준 시간들은 벌써 추억이 되었다.




좀 더 좋은 모습으로 아프리카라는 땅에서 잘 살고 있노라고 짠~~!! 하며 나타나고 싶었는데 그건 내 생각일 뿐. 가장 힘든 모습으로 고국 땅을 밟았다. 하필, 출국을 앞두고 몸이 슬슬 안 좋더니 배탈까지 났다. 르완다에 6개월째 그동안 없이 지내는가 싶었는데 그만 중요한 순간에 탈이 것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약을 계속 먹어도 낫지 않더니 며칠 굶다시피 해서 겨우 겨우 잡혔다. 남편의 지방 출장에 동행했던 것도 원인 중 한몫했던 것 같다. 후예라고 하는 곳의 날씨가 너무 추워 감기까지 결렸다. 그러니 고국으로 가는 길이 즐거운 일인데도 행여 또 탈이 날까 봐 너무 조심스러웠다.


확실히 몸무게는 전보다 줄었고 가뜩이나 작은 키가 더 작아지고 몸은 왜소해졌다. 오죽하면 몸 전체가 축소된 것처럼 보인다는 말을 들었을까. 그러나 다들 아프리카라는 먼 땅에서 당당히 혼자 고국 땅을 밟았다는 사실을 대단히 큰일로 생각했다. 전철만 타도 어리바리했던 내가 용감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는 생존을 위해 어쩔 없이 해내야 하는 것들이 많았다. 공항에서 쓰는 영어회화를 몇 번이나 돌려 들으며 외웠고 내가 얼마나 눈치껏 두리번거렸다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얼마나 아는 척을 했는지를 말이다.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한정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서울, 대구, 대전을 오가는 시간 분배를 잘해야 했다. 일단 미장원에 가서 머리부터 했다. 르완다에서는 미장원을 제대로 갈 수가 없어 셀프로 대충 잘라낸 머리가 들쭉날쭉했다.


손녀 신이현은 우량아다


듣던 대로 손녀 이현이는 상위 1% 안에 들 것 같은 우량아다. 키도 크고 먹성도 좋다. 그런데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이 맞지 않으면 진짜로 애를 먹었고 그 누구도 못 당할 정도로 우렁찬 성대를 가졌다. 한 번 울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울어재켰다. 조리원에서부터 아주 유명했던 이현이의 울음소리는 실제 겪어보니 혀를 찰 정도였다. 최대의 과제가 이현이의 수유량을 조절하는 것이었는데 딸은 노트에 아이의 수유시간과 수유량 배변 시간까지 기록했다. 하루 정해진 수유량을 맞추기 위한 것인데 거의 초과하는 날이 많았다. 달라는 대로 주면 좋겠지만 너무 먹이면 신장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고 의사 선생님이 주의를 줬더란다.


이현이는 우유든 모유든지 그저 입에 닿는 대로 쪽 쪽 잘도 빨았다. 우유도 잘 먹는 아이에게 모유까지 먹이려고 애쓰는 딸의 모습이 대견하면서도 내심 안쓰러웠다. 내 눈에는 비쩍 말라가는 딸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그때 딸과 사위, 그리고 나는 체력이 고갈 날 정도로 지쳤다. 그래도 딸이 가장 힘들어할 때 온 것은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주간이라는 시간이었지만 엄마라는 존재 자체가 딸에게 힘이 되었겠지 싶다.


돌아보면 그것도 잠시였던 것 같다. 딸이 보내온 영상 속에서 이현이는 고개를 빳빳이 들 수 있고 쪽쪽이도 곧 잘 빤다. 금방이라도 몸을 뒤집을 것 같고 눈도 맞추며 웃기도 잘하고 어느새 저렇게 컸나 싶을 정도로 많이 자랐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 가는 손녀의 소식이 궁금해서 핸드폰을 켜면 손녀부터 찾게 되니 이제 할머니의 대열에 확실히 들어섰다. 손녀를 바라보면서 딸이 딸을 낳았다는 것이 이렇게 뿌듯하고 감격스러운 것이다.


예삐와 함께


역시 나의 최애였던 예삐!!! 내가 떠난 자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행여 나의 존재를 잊은 것은 아닐까, 행여 내가 자기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했던 내가 우스울 정도로 반갑게 나를 반기는 것이다. 내가 대전 집을 찾았을 때 예삐는 어떤 반응을 하며 나를 대할까? 나는 그것이 참 궁금했었다. 예삐야 엄마 왔다~~!!! 하고 불렀을 때 예삐는 얼른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몸을 쭈욱 펴더니 다른 방향으로 훌러덩 뒤집는다. 야~~ 옹 한다. 그러더니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가 있는 쪽으로 방향을 틀고 쪼르르 다가와 코에 입맞춤을 한다. 순간 나는 예삐를 와락 끌어안았다. 감동의 눈물이 흘렀다. 나를 알아보네, 그렇지... 


마트에서 알배기 배추와 무를 샀다. 르완다에서는 이런 무를 구경 못했다. 우스운 일 같지만 무를 만지는 것도 감격 그 자체인 것이다. 깍두기를 만들고 배추 겉절이를 하고 밑반찬 몇 가지 만들었으니 큰 딸에게도 가져다주고 싶었다. 이참에 손녀도 한 번 더 보고 가야지 하는 생각이 사실 더했다. 그래서 그 짧은 시간에 대전에서 대구를 또 오갔는지도 모른다.


고국에 오니 매 순간이 감동이다. 전에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교통의 편리함이다. 한국이 여행 가고 싶은 나라의 선두로 꼽히는 이유가 교통이라고 했다. 내가 아프리카에 있다 보니 그것이 얼마나 피부로 와닿는 말인지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 어지간한 거리는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전에는 멀게만 느껴지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것들도 지금 내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가고 싶을 때 언제나 떠 날 수 있는 교통수단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한국을 떠나보니 알겠다. 르완다에서는 이런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이 한국에서는 그냥 현실인 것을 말이다.


주일예배를 함께 드리고 버스를 기다리다가 시진을 찍자 활짝 웃는 어머니



지방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서 서울에 있는 노모와 보내는 시간이 짧았다. 그래도 병원 검진을 함께 하고, 주일 예배를 함께 드리고, 중랑천 둑길을 산책하며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했다. 함께 잠을 자고 저녁시간이면 트롯 가수들의 노래를 시청했다. 르완다로 오던 날, 새벽 일찍 눈이 뜨였다. 사실 잠을 설쳤다. 그녀는 불면증으로 잠을 설치고, 나는 팔순의 노모를 두고 가는 것이 또 걱정이 되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지만 헤어질 때마다 자꾸만 이번이 마지막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이다. 


그녀가 누운 침대 아래에 이불을 펴고 누운 터라 새벽빛에 드러나는 노모의 등을 보았다. 굽은 등에 새벽빛이 어린다. 집의 구조상 일찍이 들어오는 아침 햇살에 더 이상 누워있을 수도 없겠지만 그것이랑 상관없이 그녀는 일찍이 다섯 명의 밥을 짓고 청소를 한다. 내가 머무는 일주일 동안도 찍찍이로 마루를 닦아내는 소리를 새벽부터 들었다. 그것은 당뇨 합병증으로 발에 염증이 생긴 막내아들, 그 아들이 디딘 둥근 자국을 닦고 있는 소리였다. 


캐리어의 무게를 맞추기 위해 짐을 풀었다 쌌다를 반복하는데 하나라도 더 가져가라고 자꾸 물건을 꺼내오신다. 기내 반입이 안 되는 것인데도 그냥 기내 트렁크에라도 넣어서 가져가라는 것이다. 부모의 마음은 다 저런 것이지 하면서도 싫은 내색을 했던 내게 혹여 서운하지는 않으셨을까. 시간이 왜 이렇게 빨리 가니~~!!!  하던 팔순 노모의 말속에 진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사람은 그리움을 먹고 산다는 말이 맞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자리, 돌아보면 또 어느새 추억이 되어 있을 것이다. 많은 이들에게 안부 인사만 전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지만 르완다로 돌아오는 내내 나는 새로운 출발을 약속했다. 


내 삶에도, 내 글에도 다시 탄력을 받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다시 적도의 심장 르완다를 향하여...  

이제는 진정 르완다를 사랑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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