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예찬

by 고석근

걷기예찬


인간은 절대적으로 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책임을 가진다. - 임마누엘 레비나스



요즘 ‘걷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산길에서, 공원에서, 순례자처럼 조용히 걷기도 하고, 주먹을 쥐고 위 아래로 힘차게 흔들며 걷기도 하고, 추위를 무릅쓰고 맨발로 걷기도 한다.


프랑스 작가 다비드 르 브로통은 그의 산문집 ‘걷기예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걷는다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한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발로 걸어가는 인간은 모든 감각기관의 모공을 활짝 열어 주는 능동적 형식의 명상으로 빠져든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걷는다는 것은 세계를 온전하게 경험한다는 것이다.’


걷는다는 것은 명상, 관능에로의 초대라는 건, 많이 걸어본 사람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친 몸을 치유하기 위해 걷는다. 최근에 부쩍 눈에 띄게 늘어난 단어가 ‘힐링’이다.


도시 문명은 인간의 원초적 고향, 자연과 멀어지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는 게 허탈하다. 도무지 신이 나지 않는다.


그럼 도시에서 각박하게 살면서, 가끔 걷기를 하며 힐링을 하면 우리는 잘 살아가는 걸까?


그렇게 살아가면 도시의 삶을 견딜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견뎌서 남는 게 무엇인가? 끝내 죽음으로 갈 텐데, 너무나 허탈하지 않는가?


‘인간은 절대적으로 타자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책임을 가진다.’


인간은 자신만 행복해서는 진정으로 행복할 수가 없다. 인간은 남에 대한 사랑, 책임을 갖는 서로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나라로 불교 공부를 하러 길을 가다 동굴에서 하룻밤 묵던 원효 선사는 해골물을 마시고는 크게 깨닫는다.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도 없는 것./ 삼계가 모두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인식이다./ 마음 밖에 따로 법이 없으니 어찌 따로 진리를 구할 것인가.’


그는 신라로 돌아온다. 그럼 그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도를 깨쳤으니, 유유자적 극락의 삶을 누릴까?


당시 신라의 불교는교리와 형식을 중시여겨 일반 백성들이 믿기 힘들었다. 이에 원효 선사는누구나 열심히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나무아미타불의 뜻을 모르면 어떤가? 계속해서 암송하다 보면, 몰입이 된다. 자신은 홀연 사라지고 자신과 세상이 은은하게 하나로 존재하게 된다. 극락의 세계다.


원효 선사는 왜 중생 구제에 나섰을까? 인도의 유마 거사는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고 했다.


도를 아는 사람은 남의 아픔에 민감해진다. 남을 위해 살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사람을 불교에서는 보살이라고 한다.


걷기의 유행이 개인의 힐링을 넘어 남과 연대하고 남과 함께 서로를 치유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이다
땀 흘려 힘껏 일하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이다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만인을 위해 내가 몸부림칠 때 나는 자유이다
피와 땀과 눈물을 나눠 흘리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라고 말할 수 있으랴


- 김남주,《자유》부분



우리는 자유를 원한다. 그런데 진정한 자유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다. ‘나를 위하여’와 ‘남을 위하여’가 하나가 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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