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키호테
우리는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 - 헤라클레이토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단편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를 읽으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르헤스는 어린 시절 가장 영향은 받은 것은 ‘돈키호테’라고 말한다. “나는 여섯인가 일곱 살 때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세르반테스 같은 스페인 고전 시대 작가들을 흉내 내려고 했다.”
그의 오랜 ‘세르반테스 흉내 내기’가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의 작품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간단하다. 20세기의 가상의 소설가 ‘피에르 메나르’가 오랜 각고 끝에 17세기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완전히 그대로 베껴 하나의 완전한 새로운 ‘돈키호테’라는 소설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말한다.
“언어상으로는 단 한자도 다른 게 없이 똑같다. 그러나 피에르 메나르의 것은 전자보다 거의 무한정할 정도로 풍요롭다.”
이 소설을 읽으며 많은 사람들은 의아해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게 무슨 창작이야? 그대로 베낀 것이?’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상식’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상식이라는 게 많은 사람이 공통으로 생각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시대마다 다른 ‘인식의 틀’이 있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삼라만상에는 각자의 본질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정말 그럴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일까? 물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잠자는 사람의 코에 물을 부으면 물은 무서운 흉기가 된다.
산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위대한 사람을 보고 ‘큰 산(태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다이아몬드가 문명인에게는 보석중의 보석이었지만, 아프리카 사람들에게는 반짝이는 돌멩이에 불과하였다고 한다.
서구인들이 아프리카에 들어갔다가 집 마당에 즐비하게 깔려 있는 다이아몬드들을 보고 놀랐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다들 다르게 그 소설을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돈키호테의 작가는?’하는 문제를 오랫동안 풀다보니 우리는 ‘돈키호테의 저자는 세르반테스야!’라고 생각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돈키호테’는 없다.
읽는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마다 다르다. 돈키호테라는 소설은 이름이 돈키호테이지, 그 이름을 붙이는 순간, ‘돈키호테’는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만다.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약속일뿐인 것이다. 약속이 달라지면 본질은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보르헤스는 위대한 작가답게 우리의 허상을 깨어준 것이다. ‘잘 생각해 봐! 세르반테스가 쓴 돈키호테와 피에르 메나르가 쓴 돈키호테는 완전히 다르지?’
어느 가정집에 주부가 혼자 있는데, 부엌칼을 들고 있는 사람이 들어왔단다. 주부의 눈에 부엌칼은 무엇으로 보일까?
너무나 뻔한 질문이 아닌가? 세상에 ‘부엌칼’은 없는 것이다. 그 칼이 처한 조건과 상황에 따라 ‘무엇’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환상이다. 그런 것들은 찰나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만 온전히 살아있어야 한다.
바로 ‘카르페디엠(현재를 잡아라)’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존재하면서 동시에 헛것이다.
우리는 번개처럼 삼라만상(나를 포함해)이 자신을 드러내는 찰나에만 살고 있는 존재다. 찰나가 영원이다.
우리는 과거, 미래라는 허상에 빠져 살지 말아야 한다. 시간이라는 허상 속에서 살아가니까 우리의 삶이 헛헛하다.
우리는 세상에는 본질이 있다는 ‘인식의 틀’을 쉽게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벗어나야 한다. 그건 망상이니까.
이불 가게를 지날 때 묻는다
새 이불을 덮듯 너를 찾으면 안 되냐
새 이불을 덮어 상쾌하듯
너를 덮으면 안 되냐
건널목에 서 있을 때 나는 묻는다
파란 불. 내 마음에 켜진 새파란 불빛과
길 건너의 오히려 낯익은 세계를 너는 반가워하느냐
〔......〕
명쾌하지 못한 내가 아니라
누구나 그렇다는 이 청춘이 싫어졌다
- 김소연,《누구나 그렇다는》부분
시인은 ‘새 이불을 덮듯 너를 찾으면 안 되냐’ ‘새 이불을 덮어 상쾌하듯/ 너를 덮으면 안 되냐’하고 묻지만, 세상이 그런 그녀를 받아줄까?
그녀는 ‘누구나 그렇다는’ 생(生) 앞에서 절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