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by 고석근

추억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 때문에 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을 갖는 것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막내둥이가 앞에서 걸어가는데, 신발을 신지 않았다. 나는 아이를 번쩍 들어서 안고 발을 손으로 감싸고 걸었다.


날씨가 쌀쌀한데 빨리 버스를 타야 가야겠다. 버스 정류장으로 가니 다 큰 막내둥이가 한 아저씨와 말다툼을 하고 있다.


막내둥이가 투덜댄다. “상주에 가는 버스 시간표를 물었는데, 저 아저씨가 가르쳐 주지 않아요.”


나는 아저씨에게 통사정하였다. “아저씨, 아이가 아직 철이 없어 그러니 너그러이 이해해 주십시오.”


아저씨는 “그럼 술 한 병 사시오. 그럼 버스 시간을 알려주겠소.” 하더니 누가 마시다 만 소주병을 들고 왔다. 나는 그 아저씨 술잔에 소주를 따라주었다.


그는 연거푸 마시며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소주를 다 마시자 웃으며 말했다. “상주 가는 버스는 이제 없어요.”


나는 기다리는 승객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상주 가는 버스 시간 아시는 분 계세요?” 몇 번이나 소리쳤지만 다들 말없이 조용히 서 있었다.


‘아, 어떡하나?’ 나는 막내둥이의 두 발을 감싸 안으며 안절부절 못했다. 그때 방 안이 환해졌다.


‘아, 꿈이었구나.’ 나는 환해오는 창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추악한 추억이 떠올랐다. 국민학교 6학년 때였다.

그때는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어 밤 10시까지 보충수업을 했다. 어느 날 밤 여느 때처럼 수업이 끝나고 교실 밖으로 나오려는데, 헉! 내 신발이 없다.


신발장 여기저기 다 찾아보아도 내 신발을 찾지 못했다. ‘남의 신발을 슬쩍 신을까?’하고 생각했지만, 소심한 나는 양말만 신은 맨발로 학교를 나섰다.


추운 겨울이었다. 길바닥 여기저기가 얼어 있었다. 하지만 발 시린 줄도 모르고 이웃 마을 친구와 마중 나온 아버지와 친구 누나 넷이서 함께 걸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신발을 신지 않았다는 말을 했고, 친구 누나가 나를 염려해주는 말을 했고, 아버지는 말씀이 없으셨다.


잊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때의 추악한 추억이 작은 아이로 변신해 꿈에 나타난 것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젊은 시절에 유부녀와 사랑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는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가슴앓이를 하다 우연히 한 신문에서 유부녀와 사랑을 나누다 권총 자살한 젊은이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한 작품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고 한다. 그러면 괴테의 아픈 추억은 어떻게 되었을까?


파우스트 앞에 메피스토펠레스로 나타난다. 파우스트가 “너는 누구냐?” 소리치지 그는 대답한다. “나는 악마다. 악을 추구한다. 그런데 끝내는 선을 이룩하는 힘의 일부다.”


파우스트는 그에 의해 젊음을 되찾고 젊을 때 이루지 못한 사랑을 한다. 그렇게 파우스트는 나이가 들어간다.

어느 날 파우스트는 부르짖는다. “아, 시간이여 멈춰라. 너는 진정으로 아름답구나.”


약속대로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그의 영혼을 가져가려 하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노력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천사들이 파우스트의 영혼을 안고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


괴테의 개인적인 아픔은 인류의 아픔이 되고 인류의 구원이 되었다.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다.”

니체는 말했다. “진리는 추악하다. 진리 때문에 망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예술을 갖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추악한 진리’ 때문에 망한 것이다. 한평생 추구한 진리는 그의 머릿속에 가득 차 그의 가슴은 더 이상 뛰지 않았다.


악마가 나타나서야 그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가슴에 뜨겁게 불타오르는 아름다움(예술)이 그를 구원했다.


인간은 오랫동안 진리의 등불로 삶의 길을 찾아왔다. 하지만 진리는 눈앞에 보이는 길만 환하게 보여줄 뿐이었다.


보이지 않는 길은 가슴만이 안다. 나의 가슴이 뜨겁게 불타올라야 나는 잃어버린 신발의 추억에서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죽 트렁크


이렇게 질겨빠진, 이렇게 팅팅 불은, 이렇게 무거운


지퍼를 열면

몸뚱어리 전체가 아가리가 되어 벌어지는


수취거부로

반송되어져 온


토막 난 추억이 비닐에 싸인 채 쑤셔 박혀 있는,


- 김언희, <트렁크> 부분



시인은 수시로 ‘수취거부로/ 반송되어져 온’ ‘트렁크’를 받나 보다. 그녀는 우리 모두를 대신해 트렁크를 받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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